▲지난 4월 25일, 평택 쌍용차 공장 정문 앞에 마련된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 이윤형씨의 분향소. 그의 죽음으로 2009년 구조조정 이후 사망한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은 22명이 됐다.
박소희
정확히 10년 전, 나는 감옥에 있었다. 1750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서 함께 살기 위해 파업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2001년 2월 20일 새벽 부평공장에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조위원장이었던 나는 그날부터 1년 동안 산곡동 성당에 갇혀 살아야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근로기준법 24조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발생하면 정리해고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노동악법 1호'를 만든 후, 전국의 노동자들은 언제 잘릴 줄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현대차, 만도기계로 이어진 정리해고와 공권력 침탈은 대우자동차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의 대가는 구속과 수배, 그리고 오랜 해고 생활이었고, 공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가정이 파탄나고, 노숙자가 돼 사라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1년 부평의 '노동자 잔혹사'는 고스란히 2009년 쌍용자동차로 옮겨왔고, 22명의 죽음이라는 가장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민주당 정권의 노동악법 1호, '정리해고법'이라는 괴물은 파산이나 부도에 이른 기업을 넘어 장래에 다가올 경영상의 위험까지 '정당한' 해고로 만들었다. 회계조작과 기술유출로 빚어진 쌍용차, 대우자동차 맞은 편에 있는 콜트·콜텍과 대우자동차판매, 한진중공업과 풍산마이크로텍, 시그네틱스와 K2코리아까지... 이름을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업장에서 잔혹한 정리해고가 계속되고 있다.
부평의 노동자 잔혹사가 평택으로고용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2011년 고용보험 피보험자격을 상실한 사람 중 정리해고를 뜻하는 '경영상 필요에 의한 퇴직' 노동자는 10만3274명이었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2만6555명 이래 최대로 13년 만에 10만 명을 넘은 것이다.
이 수치에는 언제나 마음껏 쓰고 자를 수 있는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중소기업의 노동자들, 회사의 압력으로 자진 퇴사한 노동자들의 숫자가 빠져있다. 그만큼 정리해고가 전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름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정리해고 사업장 중에서 회사가 망해서 노동자가 정리해고를 당하고, 회사 사장도 '알거지'가 됐다는 기업을 들어본 적이 없다. 거꾸로 정리해고한 회사에서 사용자들은 고액의 주식 배당을 챙겨갔고, 더 큰 부자가 됐다.
5년의 해고 생활 후 공장으로 돌아왔더니, 정규직이 일하던 자리를 많은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2008년 겨울 미국발 경제 위기가 몰아치자, 회사는 정규직 전환배치를 통해 6개월 만에 1천 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회사에 넘어간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의 해고에 합의하는 비참한 풍경이 벌어졌다.
김대중 정부가 만든 정리해고법은 그렇게 정규직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을 실업자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리고 2012년 대우자동차, 아니, 한국지엠의 노동자들은 유럽발 경제위기로 언제 또 정리해고로 쫓겨날지, 지엠이 언제 우리를 버리고 떠날지 불안에 떨고 있다.
정리해고 사업장에 알거지가 된 사장은 있는가11년 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파업 시절,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이 절실했었다. 정리해고와 공권력 진압에 맞서, 계엄을 방불케 하는 경찰의 잔인한 폭력에 맞서 온 몸으로 함께 싸워 줄 국회의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고,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출마했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으며 돌풍을 일으켰을 때 마음속 한 켠에 기대가 있었다. 의회주의에 매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현장의 노동자들은 적잖은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씩 노동자에게서 멀어졌다.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은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구속되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이 돼갔다. 거리와 공장에서 노동자, 서민들과 함께하는 투쟁이 중심이 아니라 국회 안에서 거래와 타협이 중심이 됐다. 그 결과, 2007년 대선 패배와 분당으로 이어졌고, 노동자들의 기대와 희망은 무너져 내렸다.
2001년 절실했던 노동자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