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대학처럼 바꿨더니... 뒤죽박죽됐습니다

[학생부장 일기 19] 교과교실제 시범 시행 학교 교사가 본 교실풍경

등록 2012.07.06 17:29수정 2012.08.2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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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마다 부착된 교과 교실을 안내하는 알림판.
계단마다 부착된 교과 교실을 안내하는 알림판.서부원

어디까지나 '시범 시행'라고 이름 붙긴 했지만, 정부의 굳건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른바 중·고등학교 교과교실제의 운영 계획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긴 '시범 시행'이나 '공청회' 따위의 절차가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하기 전의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지만, 무작정 강행하려는 건 위험천만한 도박처럼 느껴진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지만, 필자가 근무하는 곳이 작년에 교과교실제 시범학교로 선정된 후 '마루타'로서 만만찮은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은 처지라 물릴 수도 없는데다, 미처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모두 불만을 토로한다. 문제는 그런 불만들이 쉬이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교과교실제, 종국에는 학점제 도입... 수준에 따라 월반도 가능

교과교실제란 기존의 학년, 학급 담임 체제에서 교과수업 중심으로 공간을 재편하고 학사운영을 하는 방식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전국의 중·고등학교가 대학 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종국에는 학점제가 도입되어 아이들의 수준에 따른 월반이 가능하게 되어 사실상 학년과 학급 구분이 사라지게 된다.

기존 교실이 교과별, 교사별로 배정되었고, 기존의 교무실도 완전히 바뀌었다. 적어도 교실에는 학년, 반 구분이 없다. 오로지 국어교실, 영어교실, 수학교실이 있을 뿐이다. 모든 교사가 함께 생활하는 교무실은 이젠 없다. 같은 교과 교사들끼리 모인 교무실이 과목 숫자만큼이나 많다. 국어교무실, 영어교무실, 수학교무실, 이런 식이다.

학급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자리에 '홈베이스'라는 낯선 이름의 신축 공간이 등장했고, 이곳은 흡사 체육관이나 찜질방의 라커룸과 같은 용도로 쓰인다. 가방이나 책, 신발과 같은 걸 일과 중 보관하는 개인 사물함이 도서관 개가식으로 놓이고, 도난 방지용 CCTV가 사방에 설치됐다. 아이들은 등·하교할 때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마다 이곳에 들러 다음 시간 수업 준비를 하게 된다.

교과교실제를 위해서는 교실을 확보하기 위해 건물을 신축하는 건 두 말할 것도 없고 기존의 공간을 재구성하는 데만도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그런데도 굳이 전국 모든 학교로 확대하려는 건, 한마디로 수업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곧, 같은 교과 교사들의 상시 협력을 통해 교과별 전문성을 신장시키고 수업의 수월성을 높여 학습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런데 시범 실시 단계라 섣부른 판단일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드러나고 있는 걸 보면 게도 구럭도 다 잃는 모양새다. 우선, 시행 취지대로 수업의 질이 나아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거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몇몇 아이들은 되레 더 나빠졌다는 반응이다.

"언제는 교실에 기자재가 없어서 수업이 안 됐나요? 교실에 수학 공식 붙여놓고 수학자들 사진으로 도배하면 아이들이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될 거라는 기성세대의 발상이 너무 어이가 없는 거죠. 사실 빔프로젝터나 전자칠판 같은 고가의 기자재 한두 개 설치된 것 말고 기존 교실과 달라진 건 없잖아요."


고작 10분의 쉬는 시간 동안 교과교실을 찾아 돌아다니기 너무 어렵다며 불평하는 한 아이의 맵찬 평가다. 아닌 게 아니라, 몇몇 교사들은 숫제 '어수선한 장비들'이 없던 옛 교실 환경이 더 좋았다고 말한다. 수업의 질은 교사의 자질과 능력이 '8할'이다. 교사의 기자재 조작 능력이 수업능력을 증명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교실 환경에 선진 기술을 도입한다고 해서 없던 자질이 생길 리 만무하다.

한 교무실에서 같은 교과 교사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다고 해서 소통이 원활해지는 것도 아니다. 학창시절 단 한 번도 협동학습을 해본 적도 없고, 일류와 명문을 주술처럼 되뇌며 연대보다는 무한경쟁에 더 익숙해져 버린 기성세대 교사들을 다짜고짜 한 공간에 모아둔다고 협력할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일까.

더욱이 적잖은 교사들이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에 대해서는, 실력이 있건 없건, 대단한 '프라이드'를 지니고 있다. 다른 교과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교과 교사의 조언조차 달갑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 어렵사리 꺼낸 말에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라'며 발끈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인지, 다른 학교 교사들끼리 모인 교과 동아리와 동호회가 더 활성화되곤 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전문성 높이기, 같은 교과 교사들 모여라... 그럼 '기타 과목' 교사는?

하긴 국·영·수 교사를 빼면 한 학교에서 같은 교과 교사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이른바 '기타 과목'의 경우, 교사가 한 명인 교과가 태반이다. 필자가 속한 사회과교무실의 경우만 봐도, 사회, 윤리, 지리, 한국사, 경제 교과 교사가 한 데 모여 있다. 대체 누구랑, 어느 교과랑 협력해 전문성을 높이고 수월성을 확보하라는 걸까.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같은 교과군으로 묶여 있지만, 경제와 한국사의 차이가 경제와 수학과의 그것보다 작다고 할 수 있을까. 하물며 물리와 화학, 지구과학과 생명과학 교사들이 한 데 모여 있는 과학과교무실은 더 말해서 무엇할까. 현실이 이러하니, 수업이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아이들의 솔직한 답변은 어쩌면 교사들조차 예측했던 바다.

이처럼 학습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해지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우선 학급 담임교사들의 생활지도가 시나브로 무력화되고 있다. 기실 교과교실제는 기존의 학년과 학급 담임제도와는 공존할 수 없는 운영체제다. 학급의 담임교사는 있되 담임교사의 학급은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아침 등교 후 담임교사가 출결만 확인하면 그것으로 학급 아이들과의 만남은 끝이다. 곧장 교실을 비워주어야만 한다. 그곳은 우리 반, 담임 반 교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과교실이기 때문이다. 국·영·수 등 수준별로 분반되는 과목은 담임교사는 물론, 같은 반 친구들조차 일과 중 만나기가 어렵다.

만약 청소시간과 야간자율학습이 없다면, 아침에 등교해서 담임교사와 만난 그 교실을 단 한 번도 다시 들어오지 못한 채 하교하는 아이들도 있다. 출결 확인 후 뿔뿔이 흩어지면 담임교사가 특정 아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몇 교시, 무슨 과목 시간인지 아는 것 정도로는 부족하다. 어느 수준 학급인지, 또 해당 교실은 어디인지까지 일일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과 중에 만나서 상담할 시간은커녕 아이를 찾기조차 어려운데, 어찌 담임교사와 아이들 간의 소통과 공감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명목상 학급의 이름은 남아있어, 학교폭력이나 도난 등 학급 아이들의 생활지도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떠안게 돼 담임교사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예 생활지도가 담임교사의 손을 떠났다고 푸념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기 학급과 교실에 대한 애착이 없으니, 환경 상태가 그야말로 엉망이다. 아침 등교 직후 교실 안팎을 깨끗이 청소해봐야 1교시만 끝나면 바닥에 쓰레기가 널브러지고, 책상과 의자도 자신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통 지워지지도 않는 낙서투성이다. 공공기물을 아껴 쓰라고 경을 외듯 외쳐봐야 역부족이다.

자기 방 비질조차 해본 적 없는 아이들이 태반인 현실에서 그렇잖아도 교실 환경이 지저분한데 교과교실제는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내 교실'이라는 생각조차 없는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내 학교'라는 인식을 하라고 강조해봐야 귓등으로 들을 뿐이다. 몇몇 교사들은 두 손 두 발 다 든 채, 각 학년과 교실마다 전담 환경미화원을 채용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교과교실, '내 교실'이라는 인식 없어... 1교시 끝나면 쓰레기 가득 

 교실을 안내하는 알림판. 과도기여서 그런지 교과교실명 아래에 작은 숫자로 기존의 학급명이 병기돼 있다.
교실을 안내하는 알림판. 과도기여서 그런지 교과교실명 아래에 작은 숫자로 기존의 학급명이 병기돼 있다. 서부원

도난 사고가 다소 늘어나게 되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지만, 그 빈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고가의 스마트폰을 소지한 아이들이 많아지다 보니 덩달아 분실과 도난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값비싼 브랜드 가방과 신발이야 오가며 눈에라도 띄지만, 호주머니에 담긴 스마트폰은 일일이 소지품 검사를 하지 않는 다음에야 되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단 도난 사고가 잦으면 아이들 사이에 불신이 쌓이고 관계가 험악해지기 일쑤다. 교사들이 도난 사고를 두려워하는 건 그래서다. 기실 상황을 파악하고 누구의 소행인가 밝히기 위해 일일이 조사하는 번거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학급 내에서 도난 사고가 몇 번 터지면 그 해의 생활지도는 포기해야 한다는 '속설'이 떠도는 이유다.

물건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하소연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들어 학부모들로부터 걸려오는 민원전화의 태반은 도난 사고와 관련된 것이다. 개중에는 화난 마음에 '그 학교는 도둑놈들을 길러 내는 곳이냐'며 대놓고 막말을 내뱉는 예도 있다. 해마다 자잘한 도난 사고는 있어 왔지만, 올해 유난히 잦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요컨대, 교과교실제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진 않다. 아무렴 정부가 아무런 검증도 되지 않은 제도를 밀어붙이려 하겠는가. 다만, 전국의 모든 학교에 서둘러 일괄 적용하려는 건 무모한 짓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규모가 작거나 특성화 교육을 지향하는 일부 학교의 경우, 교과교실제는 효율성은 물론 교육적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백 보 양보해서, 아무리 학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해도, 앞서 말한 부작용에 대한 실효적인 대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학교는 더 이상 '교육'을 위한 공간일 수 없다. 적어도 대학이 아닌, 중·고등학교 교육의 목표는 '지식 전수'가 아닌 '인성 함양'에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교과교실제와 같은 하드웨어를 고민하는 것보다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왜곡시키고 있는 학벌구조를 우선 타파하는 것이 훨씬 더 교육적이고도 근본적인 해법이 아닐는지.
#교과교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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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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