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배 불룩 튀어나온 시인들은 쓸 수 없는 시"

황매산 기슭 산골마을 사는 서정홍 시인,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펴내

등록 2012.08.07 10:12수정 2012.08.0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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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밭에서/이랑을 갈다가/그 자리에 누웠습니다//나는 금세/이랑과 하나가 되었습니다/참 편안합니다//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새들이 날고/노랑나비 한 마리 춤을 춥니다//바쁠 것도 없다는 듯/너울너울."(시 "하루" 전문).

시집 <58년 개띠>(1995년)를 펴냈던 서정홍 시인의 시다. 황매산 기슭 산골마을에 사는 그가 최근 새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보리' 간)를 펴냈다. 최수연 작가의 사진을 넣어 볼거리가 풍성한 시집인데, 75편의 시가 실려 있다.


a  서정홍 시인의 새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의 표지.

서정홍 시인의 새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의 표지. ⓒ 보리출판사

땅을 일구며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시인과 그의 식구들, 마을 사람들의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요즘 농촌생활이 힘들다고 하는데, 시인의 이곳 생활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시가 있어 그렇고, 자연을 닮아가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외국 농산물을 우리 밥상에 올리고, 사람보다 물질을 귀하게 여기는 세태를 꼬집는다. 요즘은 제사상에까지 수입 농산물이 즐비하게 오른다고 하는데, 시인은 그런 것에 호통을 친다.

시인은 "아무리 봐도 먹을 게 없구나/핀란드산 조기에/중국산 나물에/미국산 오렌지에/칠레산 포도에/ 온통 믿을 수 없는/수입 농산물뿐이구나"라고  한탄하면서 "이놈들아/제상 확 엎어 버리기 전에 다 치워라"(시 "후유, 꿈이었구나" 일부)라며 조상이 되어 나무라고 있다.

시인은 쌀 한 톨의 소중함을 안다. 흔히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 하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한다. 시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직접 생산한 쌀로 밥을 지어 먹으면 '착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농민들은 FTA로 손해를 봐도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가 보다.

"내 손으로/농사지은 쌀로/정성껏 밥을 지어/천천히 씹어 먹으면/나는 저절로 착해진다."(시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전문).

"밥 한 숟가락/목으로 넘기지 못하고/사흘 밤낮을/꼼짝 못하고 끙끙 앓고는//그제야 알았습니다/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여태/살아왔다는 것을."(시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전문).


농부가 아니라면 자기 몸과 삶을 지탱해주는 근원이 밥 한 숟가락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평범한 말로 시를 썼지만, '밥 한 숟가락'이 자연이요 생명이며 우주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소박한 밥상이다. 똥오줌 거름을 먹고 자란 우리 쌀로 지은 밥에다 텃밭에서 바로 딴 채소를 올린 밥상이다. 시에는 서정홍 시인의 겸손함이 드러나 있다. 시를 읽는 독자도 소박한 밥상을 함께 즐기게 한다. 시인의 일상과 밥상이 풍경화처럼 그려져 있다.


박남준 시인은 서정홍 시인의 시를 읽고 "소박한 밥상을 먹고 사는 사람만이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며 "기름기 가득한 밥상을 찾으며 아랫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시인들은 절대로 쓸 수 없는 시"라고 했다.

시인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가족들은 시인처럼 서로 나누며 배려한다. 농촌의 삶이 힘들지만, 시인 가족의 마음은 넉넉하다.

"연암사 들머리/신령스런 기운이 돈다는/육백년 넘은 느티나무 밑에서//아내한테 말했습니다//"여보, 이렇게 큰 나무 앞에 서면/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아내가 말했습니다//"여보, 나는 일 년도 안된/작은 나무 앞에 서 있어도/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시 "아내는 언제나 한 수위" 전문).

"늙을수록/지은 죄가 많아/하품을 해도/눈물이 나옵니다"(시 "고백록" 전문).

도회지에 살다 한번쯤 고향산천이 그립거나 팍팍한 일상에서 한번쯤 쉼표를 찍어 보고 싶을 때 읽으면 삶에 거름이 될 시들이다.

"뒤에서 봐도/늙은 농부가/비탈진 산밭으로/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간다//늙은 농부 앞세워/화사한 등산복을 입은/젊은이들이/왁자지껄 걸어간다."(시 "풍경1" 전문).

"효자는/농번기 때 오고/불효자는/농한기 때 온다."(시 "맞는 말이면 손뼉을" 전문).

서정홍 시인은 시집 <58년 개띠>와 <아내에게 미안하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동시집 <윗몸일으키기> <우리 집 밥상> <닳지 않는 손>, 자녀교육 이야기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지요>, 산문집 <농부 시인의 행복론> <부끄럽지 않은 밥상> 등을 냈다.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서정홍 지음, 최수연 사진,
보리, 2012


#서정홍 시인 #농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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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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