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사 17명 행적 발굴, 정부포상 신청합니다"

향토사학자 추경화씨, <고종실록> 등 기록 찾아

등록 2012.08.15 21:05수정 2012.08.1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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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가 항일투사 17명의 행적을 새로 찾아내 정부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15일 추경화(60·진주)씨는 "경남지역 출신 항일투사들의 행적을 새로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추경화씨는 <고종실록>과 <일제 강점기 형무기록>, 신문 기사 등을 조사했다. 새로 발굴한 항일투사는 김종범·권우성·김기태·김호종·강영호·박영환·박덕실·박재표·신태민·손우상·양문칠·유경환·최보림·황원방·장준 선생이다. 정부포상이 낮아 재심을 청구한 2명(정한용·강달영)도 포함돼 있다.

김종범, 권우성, 강영호, 김기태 선생은?

진주공립농업학교 제1회 졸업생인 김종범(金鍾範·1891~1972) 선생은 부산에서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를 도왔고, 부산청년회 총무간사, 조선청년연합회 임시의장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만주에서 '정통단' 단장으로 활동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됐으나 탈옥하고, 다음해 다시 체포돼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산청 출신인 권우성(權又成·1915~1951) 선생은 서울중앙고보 재학 중 반제동맹에 가입해 1933년 2월 일제의 열하 출병을 반대하는 반전격문을 살포하다 일경에 체포돼 그해 4월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선생은 1934년 마산에서 반전운동을 전개하고 서울에서도 반전격문을 살포하다 또 체포됐으며, 1937년 7월 징역 3년 6월형이 언도돼 옥고를 치렀다.

진주 출신은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1920년 경남·전남 일대에 항일전단 수천장을 배포하기 위해 출발하는 날 일경에 발각돼 체포됐다. 동경대학 문학부에서 재학 중 '아동문학동인회'와 '색동회'를 조직했다. '소년 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1927년 10월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로 활동했다.

김기태(金基泰·1906~1951) 선생은 진주제2보통학교를 나와 경남청년연맹 서무부장,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위원, 신간회 진주지회 상무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진주노동연맹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징역 2년형이 언도돼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호종, 박영환, 박덕실, 박재표 선생은?

김호종(金好宗·1904~ ) 선생은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 서기장을 지냈다. 선생은 진주청년동맹 집행위원, 진주농민조합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조공재건건설 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 신태민·빈태문·김기태 선생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1934년 3월 경성지법에서 3년형이 언도돼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영환(朴英煥·1899~1955) 선생은 진주청년친목회 임원으로 항일격문을 경남·전남지역에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또 그는 1926년 경남청년연맹 주최로 강연할 때 강연이 불온하다고 중단되고 일경에 잡혀 조사를 받았고, 해방 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유공자인 한규상 선생의 부인인 박덕실(朴德實·1901~1971) 선생도 있다. <조선민족운동연감>에 의하면, 한규상 선생이 임시정부 산하 혈성단을 조직하고 활동할 때 박덕실 선생의 자택에서 숙식을 제공했으며, 이곳은 연락장소로 이용되었다.

교육자 박재표(朴在杓·1886~1951) 선생도 있다. 선생은 진주고·진주여고 설립 당시 초대 이사장(1921년 11월)으로 1만4000평을 기증했다. 선생은 진주청년회 초대회장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신간회 진주지회 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이순신 장군을 모신 남해 충렬사를 중건할 때 후원대표(1932년)로 앞장서기도 했다.

의병대장 양문칠 선생 등 포함

손우상(孫羽翔·1897~1961) 선생은 삼천포에서 3·1운동을 지도하고 일경에 체포돼 징역 7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삼천포청년회 부회장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수차례 조사를 받았다.

신태민(申泰珉·1907~1954) 선생은 진주공립농업학교 재학중 동맹휴교을 단행하다 일경에 검거되었으나 석방됐다. 또 선생은 진주청년동맹과 조공 활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돼 1934년 3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의병대장 양문칠(梁文七·일명 양치환·1884~1938) 선생은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한 <독립운동사>(537쪽)에 보면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했다는 설명이 있다.

산청 출신인 유경환(柳璟煥·1892~1956)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청년단 총무·부단장·재무위원을 지냈고, 국내 활동 중 일경에 체포돼 1921년 9월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최보림(崔普林·1900~1957) 선생은 산청 단성에서 3·1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돼 1919년 8월 9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후손들은 영국에 거주한다.

통영 출신의 황원방(黃元方·1891~1914) 선생은 1913년 6월경 중국 길림성 액목현에 독립군 양성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부친이 한의원으로 모은 돈과 재산을 모두 팔아 대금을 치르기 위해 가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한테 피살돼 순국했다.

장준(張駿·1915~1957) 선생은 진주고 재학 중 '독서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독서회 회원들은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하자 진주에서도 호응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일경에 체포돼 1934년 8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고, 학교에서 소행불량으로 퇴학 당했다.

정한용, 강달영 선생은?

하동 출신 의장병 정한용(鄭漢鎔·1865~1935) 선생에 대해, 추경화씨는 "노응규 의병은 해산명령을 불복하면서 서로 갈등이 생겨 오해가 생겼다"며 "정한용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이 <고종실록>(1907년 12월 20일조)에 등재돼 있는데, 정한용 의병은 배반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포상이 성사돼야 한다"고 밝혔다.

강달영(姜達永·1888~1940) 선생은 진주 3·1운동을 주도해 징역 3년을 언도받았고,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추경화씨는 "사회주의 활동으로 징역 6년형이 언도된 사실을 후손들이 쉬쉬하고 숨기고 근거를 제출하지 않아 낮은 등급을 받았다"며 "이제라도 재심사하여 등급을 올려 주기를 호소한다, 총 9년 징역형이 언도된 선생이 1~3년형 징역형 받은 분과 같은 등급이라면 누구든지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향토사학자 #항일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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