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 화낸 것이 아니고 저한테 화냈어요

남은 여름, 수박은 냉장고에 항시 대령하겠습니다

등록 2012.08.16 17:42수정 2012.08.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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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어머니 때문에 화가 많이 난다. 어머니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에게 화가 더 나서다. 지난 15일의 일도 그렇다. 해 질 무렵. 방학이어서 집에 와있는 딸에게 걸려온 다급한 전화목소리다.


"작년에 할머니 다치신 손이 어느 쪽 손이었어요?"
"왜 갑자기 손은?"
"할머니가 넘어지셔서 손이 부러진 것 같아요."
"전화 끊지 말고, 다친 손의 손가락을 움직여 보시라고 해 봐."
"아빠, 손가락은 움직여요."
"다행이다. 부러진 것은 아니니까 부어오른 곳에 얼음찜질 해드리고 있어."

10kg은 족히 더 되는 수박을 노점에서 사 오시다가 계단에서 넘어지신 것이다. 며칠 전 내가 수박을 사간다고 했더니 집에 과일이 많으니 다음에 사오라고 하셨다. 아침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토마토 복숭아 사과와 포도 두 송이가 있어서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출근하면서 어머니께 혹시나 해서 한말씀 드렸다.

"수박이 드시고 싶으면 꼭 아파트 상가 슈퍼에서 사시고 배달해달라고 하세요."

 우리 아파트 상가 슈퍼에는 다양한 과일을 판매 배달한다. 
수박도 보인다.
우리 아파트 상가 슈퍼에는 다양한 과일을 판매 배달한다. 수박도 보인다.이경모

이날도 처음에는 손녀딸에게 수박 사러 가자고 했다가 포도만 사오시겠다며 혼자 나가셨단다. 그랬는데 왜 수박을 사오시다가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머니는 노점에서 파는 큰 수박 값이 쌌고 다른 과일보다 수박을 더 좋아하신 것이다. 급히 서둘러 집에 왔다.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화가 난 내 모습을 보시며 어머니는 한말씀하셨다.


"애비야, 걱정마라 하나도 안 아프고 부은 것은 내일 다 빠질 것이다. 요 봐라 손가락도 움직인다."

오른손 중지와 새끼손가락 사이 손등이 많이 부어 손가락이 움직일 리가 없다. 다음날 아침. 여전히 부은 곳이 그대로다. 육안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연세가 있어 병원 가서 촬영을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사코 병원에를 가시지 않겠다고 하신다.


"참 이상합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이정도면 뼈에 이상이 있을 텐데 뼈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2주 정도 손을 쓰시면 안 되니까 손목을 고정시켜야겠습니다."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시며 뒷걸음치신다.

"그러시면 주사를 맞고 약은 꼭 챙겨 드셔야 합니다. 손을 쓰시면 안 되고요."
"예."

유치원생처럼 크게 대답을 하신다.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들러 3일분 약을 받아 집으로 오던 중, 어머니는 차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며 빙그레 웃으신다.

"그것 봐라. 아무 이상 없다고 했잖아. 수박도 안 깨지고."
"어머니~."

집에 도착해서 그 문제의 수박을 잘랐다. 깨지진 안했지만 수박 속은 엉망이다. 성할 리가 있겠는가. 어머니가 이 정도여서 정말 다행이다. 어머니는 지난 겨울 눈길에 넘어져 오른손이 부러진 바람에 6개월을 고생하셨다. 사실 이번 일에 화가 났던 것은 나한테다. 어머니는 크게 잘못한 것이 없으셨다. 당신은 수박을 드시고 싶어서 노점에서 수박을 샀다. 수박값이 일반 슈퍼보다 쌌으니 당연한 일. 노모에게 수박을 드실 것인가를 묻기 전에 내가 수박을 사 갔어야 했다.

돌아가신 뒤에 울지 말자. 살아 계실 때 잘 해드리자고 늘 마음먹지만 맨 날 뒷북만 치고 있으니 나이 50이 넘어서도 철이 덜 들었을까. 늦었지만 어머니께 한말씀 올린다.

"어머니 남은 여름 동안, 수박은 냉장고에 항시 대령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우리 곁에 오래오래 계세요. 아들 철들 때까지."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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