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2일 1차 희망버스.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이 이날 오후 3시경 한진중공업을 나오면서 조합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윤성효
기자는 희망버스가 올 때마다 취재하며 지켜보았다. 지난해 6월 11일 저녁 영도 일대에서 벌어졌던 상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참가자들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여 걸었다. 촛불을 든 사람, 구호를 외치는 사람, 아이 손을 잡은 사람, 스크럼을 짠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한진중공업 사측은 공장 안팎에 용역경비를 세워 놓았다. 공장 정문·후문 모두 용역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당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하고, 해고자들은 공장 안에 있었지만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문정현 신부, 고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씨 등이 앞장섰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12일 오전 1시 30분경 영도조선소 앞 도로에 모여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순간 담벼락 넘어 사다리가 내려왔다. 공장 안에 있던 해고자들이 사다리를 준비한 것.
해고자들이 사다리를 준비할 것이라는 예측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경찰도 용역도 대응하지 못했다. 후에 전국금속노동조합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 간부는 "조합원들이 논의해 비밀리에 준비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머리가 하얀 어르신부터 여성들까지. 서로 손을 잡아 주거나 부축하면서, '담쟁이'처럼 담을 넘었다. 공장 안에서는 담을 넘어온 희망버스 참가자와 용역경비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그 현장을 본 기자들은 대부분 함께 담을 넘어가서 취재를 진행했다.
<오마이뉴스> 편집부를 통해 희망버스 현장에 '특별한' 한 사람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편집부가 강정민 시민기자에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싸움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가족대책위 '아내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달라고 부탁한 것. 집회 현장 취재를 맡은 내게 강정민 시민기자가 현장에서 인터뷰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부터 희망버스를 함께 타고 왔다는 그를 현장에서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다. 공장 출입문이 막혀 있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를 타고 공장으로 정신 없이 들어간 탓에 강정민 시민기자를 따로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밤인데다 충돌이 발생하는 현장에서, 그것도 여성이 혼자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밤을 꼬박 세웠다. 기자도 당시 일어나는 상황을 계속 추가해서 보도했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 집회는 처음이었다.
'희망버스 동행기' 쓴 시민기자 기소... 취재도 죄가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