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동성애 커플.
청년필름
수술 받으신 지 한 달 만에 아버지의 갑상선 암이 재발했다. 서울 지역의 대학 병원에 다시 진료 예약을 했다. 근거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방 대학 병원 진료까지 예약을 해 두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가기로 한 전날,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길 잘 보라니까 옆에서 그것도 안 보냐. 좀 전에 저기서 빠졌어야 하는데."운전하던 '마님'(나의 동반자의 별명)은 내가 길치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쏘아붙인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자동차로 이동하기 위해서 '마님'은 내 업무가 끝나는 시점에 병원 정문 앞에 한 달여 가까이 대기 중이다. 신경 외과 중환자실에서 인공 호흡기와 기관 절개로 겨우 숨을 유지하시는 아버지를 아주 잠시 볼 수 있지만 말이다.
장례식 사흘간과 화장하고 납골당에 모시는 날까지 '마님'은 늘 나와 함께 해주었다. 1년 전에 커밍아웃하고 둘이 동거하노라 고백까지 했기에 어머니와 가족들도 나와 '마님'이 어떤 관계인지 잘 알았지만, 아무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어머니의 환갑이어서 우리 자매·형제들과 그들의 또 다른 가족, 그리고 '마님'과 나는 바닷가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어머니는 요즈음도 '마님'의 안부를 항상 이렇게 묻곤 하신다.
"걔는 잘 지낸다니...순진한 내 아들 꼬셔가지고, 걔랑 언제 헤어질래?"속으로 항상 이렇게 대꾸, 아니, 사실을 말하고 싶다.
"어머니, 나를 꼬신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꼬리 친 거라구."이젠, 마님과 나는 세시간 정도는 우습게 수다를 떨 수 있게 됐다. 한국 게이 인권 운동 단체 '친구 사이' 대표로서, '마님'과 동반자로서 7년여를 살아가다 보니 느는 것은 맥주 주량, 넉넉한 뱃살이다.
요즘 고민은 '입양'이다.
"여유 되면 '마님'하고 나, 아이를 입양하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우리, 이렇게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