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8일 새벽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권우성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수진영의 입장을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견해의 스펙트럼이 나온다.
①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부정하며, 처형의 정당성을 시사한다.(극우매체. 지만원·장원재)②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부정하나, 처형의 정당성은 부정한다.(뉴라이트. 안병직)③인혁당 사건이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나, 사과할 사안은 아니다.(새누리당 친박계. 이한구·김병호)④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자들은 간첩이다.(새누리당 친박계. 한기호) ⑤인혁당 사건은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니, 박근혜가 사과하라.(새누리당 비박계와 보수언론)이게 바로 한국 보수의 스산한 풍경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①에서 ④까지의 입장이리리라. 그것들은 명백한 역사 수정주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견해들은 망언에 가까워, 논쟁보다는 스캔들의 대상이 될 뿐,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⑤이다. 왜? 이 입장은 '사과'라는 쿨한 말 속에 가장 핵심적인 검증의 항목을 슬쩍 은폐하기 때문이다. 바로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공식적 입장이다. 아래 문장을 보라.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니, 박근혜가 사과하라 최근 보수언론들도 경쟁적으로 박근혜를 향해 이렇게 주문한다. 하지만 이 말로써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애매하다. 그 주문은
(1)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만 사과하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2) '유신독재 자체에 대해서 사과하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핵심은 역시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입장이다. 왜? 인혁당의 피해자들은 바로 유신독재에 항거하다가, 유신헌법으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단순한 실수나 오류로 인한 사법의 피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에 관한 박근혜 후보의 입장은 이런 것으로 보인다.
유신은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위한 구국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만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자신의 언급을 "사과로 받아 들여 달라"거나 "유가족이 허락하면 만날 수 있다"는 박근혜 후보의 말은, 인혁당 사건을 '유신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는 관계없는 고립된 개별사건으로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설사 유가족을 만나 사과를 하더라도, 박근혜는 여전히 아무 모순 없이 '유신체제가 정당하다'고 말할 게다. 그런 의미에서 홍사덕 전 의원은 박근혜의 입장을 제대로 요약했다. "유신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에 '박사모'가 화답한다.
"독재 정권을 용인한 북한에서 (중략) 정치범 수용소에서 떼로 죽어 나가며 아예 야당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지만 우리는 김영삼·김대중 등 야권 지도자는 건재했다. 그들이 유신 당시에도 항거할 수 있었기에 독재라도 상당히 느슨한 독재였다." 헌정을 수호할 대통령의 책무 박근혜 후보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은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에 대한 공식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의 헌정을 유린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이 되려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는 헌법을 수호하는 데에 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은, 자신의 집권 시에 행여나
(1) 나라가 혼란하여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그것을 '혁명'이라 환영할 것인지, (2) 자신에게 국민이 저항할 경우 유신과 같은 초헌법적 조치를 취할 것인지,여부를 묻는 것이다. 이 두 물음의 어느 것에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는 후보는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 쿠데타를 용인하고, 파쇼헌법을 옹호하는 것은 헌정을 수호할 책무를 진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연좌제'라고 비난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박근혜 후보가 내세우는 국정운영의 경험은 유신시절에 습득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 국민은 박근혜 후보를 유신의 어두운 기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의향이 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를 그 어두운 시절과 연결시키는 끈은 박 후보 자신이 맨 것이다. 끈을 풀어버리라는 제 당의 조언도 거부하고, 국민의 요청도 거절하고, 제 스스로 옭아맨 것이다. 결자해지. 그 끈을 푸는 것은 박근혜 후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개인적 생각까지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것은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사적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점은 박근혜 자신이 <나의 삶, 나의 아버지>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공적 검증의 대상인 정치철학을 아버지 박정희가 아니라 독재자 박정희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다.
"유신체제와 같은 독재가 되돌아 올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가 어디 일본의 식민지배가 되돌아올 것이 두려워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요구했던가. 게다가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경험해 봤다. 아무리 민주화가 됐어도,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질 낮은 대통령 한 명이 민주주의를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을 지난 5년간 똑똑히 목도한 바 있다. 그런 국민이 헌정을 파괴한 독재자에게 정치를 배운 인물이 대통령이 되는 데에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설사 '상당히 느슨한 독재'가 된다 하더라도.
언젠가 통합진보당과 관련해 '종북' 논란이 일어났을 때,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은 종북의원을 가려내는 기발한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옛날 천주교가 들어와 (신도를 가려내려고) 십자가를 밟고 가게 한 적이 있지 않느냐." 이런 잣대를 새누리당 자신에 들이댄다면, 박정희 사진을 깔아놓고 박근혜 보고 밟고 지나가라고 요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누구도 그런 봉건적 잔악함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이번 기회에 새누리당 의원들이 그 발언이 얼마나 잔악한 것이었는지 깨닫고, 자신들의 공직후보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를 원할 뿐이다.
내가 김진 위원을 존경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