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네들은 짐도 없고 잠도 없어"

[시골 한의사, 미국을 달리다 12] 미국 자전거 횡단 37일 - 39일 각양각색의 라이더들

등록 2012.09.25 10:04수정 2012.09.2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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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수요일

Eminence, MO - Hartville, MO
79.5 mile = 127.2 km


오전 7시 조금 못 되는 시각. 여행에 적응된 몸은 알람의 도움 없이도 재깍재깍 활동을 개시한다. 마침 게리 조(Gary Joe) 아저씨도 트레일러에서 나오며 기지개를 편다. 새벽부터 일 나간 줄 알았더니 9시부터가 정식 작업시간이란다. 엊저녁처럼 또 다시 모닥불을 피운다. 그런데 비닐은 왜 태우시나?

"그거 태우면 공해물질 나오는데요."
"원래 땅 속에 있어야 되는데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까 이렇게 없애야지."

비닐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쪼그라든다. 이번에는 티셔츠를 가져와 불에다 집어넣었다. 자신만의 빨래 방법이라는 '게리'의 변명. 더 이상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옷은 땔감으로 써야 물과 비누를 아낄 수 있다는 것.

"태우면 다시 사야 되는데 자원 낭비잖아요?"
"아니지. 티셔츠 한 벌을 더 사려는 내 수요가 경제를 활성화시키거든."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 더 많은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 공장을 가동하면 그만큼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하에 가둬놔야 한다던 석유를 한껏 퍼내야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궤변.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의 남다른 소신이 한낱 개똥철학으로 격하되는 순간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어느덧 불길이 안정된 모닥불 위에 프라이팬이 놓였다. 아침식사로 계란 스크램블을 만드는 게리. 난 그를 뒤로 하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1마일이나 갔을까. 눈이 따끔해지며 눈물이 계속 나와 시야를 가렸다. 얼굴에 바른 선크림이 땀에 흘러내려 안구를 자극한 때문이다. 갓길에 자전거를 대고 물을 뿌렸다. 희뿌연 시야 너머로 두 라이더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아, 잠깐만! 같은 방향에서 라이더를 만나는 건 처음인데. 따가운 눈도 잊은 채 서둘러 그들을 쫓아갔다.


언덕을 하나 넘고 쉬는 그들을 쉽게 따라 잡았다. 샘 휘태커(sam whitaker)와 리사 휘태커(Lisa whitaker) 부부는 버지니아 주에서 오리건 주까지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타고 있다.

 샘 휘태커(sam whitaker)와 리사 휘태커(Lisa whitaker) 부부 아내의 피부 발진 때문에 이른 아침에만 라이딩을 한다.
샘 휘태커(sam whitaker)와 리사 휘태커(Lisa whitaker) 부부아내의 피부 발진 때문에 이른 아침에만 라이딩을 한다.최성규

내가 한국인임을 밝히자 바로 북한 이야기를 꺼낸다. 미국인들에게 북한은 항상 화젯거리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김일성'과 '김정은'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아프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누구나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의 영어 철자를 정확히 쓰게 됐듯이 언론과 정치의 끊임없는 주입식 교육은 그들을 유명인사로 만들어냈다.

"주한미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내세우는 명분이야 좋지만 남북한이 속히 통일이 돼서 외국군대가 머무르는 일은 없어져야죠. 하지만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통일을 그다지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의깊게 내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런 그들과 동료가 되고 싶었다. 허나 인연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 이들의 평균 속도는 하루에 40~50마일. 나도 모르게 한숨이 배어나왔다. 그래 가지고 어느 세월에 오리건 주까지 가나요?

거기다 리사(Lisa)에게는 하루하루가 힘겨운 상황이었다. 여행 초반까지는 괜찮더니 요즘 들어 한낮에 태양빛을 쬐면 피부 발진이 돋는다. 그 이후로 이들 부부는 이른 아침에만 라이딩을 하게 되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새벽 5시에 출발했다니 점심 무렵이 되면이미 7시간은 페달을 밟게 되는 셈. 여기서 18마일 떨어진 섬머스빌(summersville)이 오늘의 목적지다.

기대는 말짱 황이다. 함께 라이딩을 하나 했더니 이렇게 틀어진다. 사람 만나는 게 다 이렇다. 완벽하게 자신과 들어맞기는 요원하다. 조금 더 쉬어가겠다는 부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출발한다.

하트빌(Hartville)가는 길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만큼 도로도 시원하게 뚫려 있다.
하트빌(Hartville)가는 길새파랗게 펼쳐진 하늘만큼 도로도 시원하게 뚫려 있다.최성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어찌어찌 80마일 가까이를 달렸다. 하트빌(hartville)에 도착. 자전거 여행자들은 마을 도서관 앞 풀밭에서 캠핑을 할 수 있다.

선선한 저녁시간을 노리고 삼삼오오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을 방문한 동양인 라이더는 그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냈다. 캠핑 장비를 바닥에 풀어놓으며 나는 그들의 말 상대를 해주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나도 미국횡단을 하려고 친구들과 계획을 짰던 적이 있지. 한 녀석이 이러더군. '올해는 바빠서 안 되겠어. 미안한데 미루면 안 될까? 내년에는 꼭 하자.' 그래서 다음 해로 미뤘는데 누군가가 또 '내년, 내년'을 외쳤어. 그래서 아직까지 안장에 올라가보지도 못했지. 내년은 절대 오지 않아. 지금만 있을 뿐이지."

내년은커녕 내일도 오지 않는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다. '그 진리를 알고 있는 너가 현명한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아저씨는 어스름 속으로 터벅터벅 사라졌다.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린 무수한 미래들을 곱씹으며.

6월 21일 목요일

Hartville, MO - Fair grove, MO
42 mile = 67.2 km

눈물이 난다. 선크림이 계속 말썽이다. 눈가에 밀착해서 발랐더니 흐르는 땀에 씻겨 내린 것이다. 뜨지도 감지도 못 한 채 페달만 밟는다.

그러는 와중에 졸음이 몰려온다. 어제 무리해서 80마일 달린데다 씻지도 못하고 잠들었더니 피곤이 온몸에 그대로 묻어있었다. 수면의 신 힙노스(Hypnos)가 어깨에 내려 앉았다. 그는 밤의 신 닉스(Nyx)와 암흑의 신 에레보스(Erebus)의 아들이며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와는 쌍둥이 형제이다. 죽음을 영원한 잠이라 생각했던 고대인들은 '타나토스'와 '힙노스'를 형제로 생각했다. 이대로 달리다가는 타나토스가 내 목을 잡아 쥘지도 모른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됐는지라 멈추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휴식지점인 10마일까지 이를 악물고 달렸다. 나무 그늘 밑에 이르러 몸을 던지다시피 누웠다. 등이 땅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짧은 토막잠이지만 적절한 타이밍의 휴식은 큰 도움이 된다. 아침 일찍 내리던 보슬비는 어느덧 사라졌다. 항공모함처럼 거대한 구름덩어리들이 하늘의 바다에 웅크리고 있다. 그들이 따가운 태양빛을 가로막아 준 덕에 선선하게 라이딩을 할 수 있었다.

잔뜩 흐린 하늘 이른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하트빌(Hartville)을 출발한 지 얼마되지 않은 마을 어귀.
잔뜩 흐린 하늘이른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하트빌(Hartville)을 출발한 지 얼마되지 않은 마을 어귀.최성규

감기 기운이 있어서 목적지를 애쉬 그로브(Ash grove)에서 페어 그로브(Fair Grove)로 변경했다. 목표치의 절반이다. 새로운 목적지에 대해 전화로 확인한 결과 히스토릭 소사이어티(Historic Society)에서 제공하는 샤워시설도 있어 큰 도움이 될성싶다.

오후 3시 정도에 도착. 아직 한낮이다. 한창 달려야 할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니 어색하기만 하다. 지난 몇 주 동안 라이더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달릴 때 달리지 않으면 숙제를 안 한 학생마냥 찝찝하기만 하다.

자전거 라이더의 식사 준비 페어 그로브(Fair grove)에서의 캠핑
자전거 라이더의 식사 준비페어 그로브(Fair grove)에서의 캠핑최성규

해가 지면서 기온이 내려간다. 조심하지 않으면 감기가 심해질 판이다. 날씨가 참으로 변덕스럽다. 낮과 밤을 적당히 섞어 놓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세상일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항시 두 개의 극단은 타협 없이 보는 사람을 애먹인다.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鎔)의 시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의 한 구절이 뇌리를 스쳤다.

왜 사냐건
웃지요.

6월 22일 금요일

Fair Grove, MO - Pittsburg, KS
100.5 mile = 160.8 km

동이 터오면 눈도 저절로 떠진다. 아침은 어제 미리 사둔 태국식 쌀라면. 석유가 떨어져 가는지 불이 시원찮다. 라면만 끓여놓고 꺼져라! 당장이라도 꺼질듯 말듯 애매하지만 끝까지 버텨주는 석유 버너.

설거지에다 짐 정리, 준비운동을 마쳤음에도 안즉 아침 8시다. 빠른 출발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그만큼 도착이 빨라지기 때문.

지도를 펴들고 오늘 코스의 고도를 살핀다. 욕심을 부려볼 만하다. 높낮이가 대체로 평탄하여 꾸준히 속도를 낼 수 있다. 예상대로라면 지도 5장을 통과하게 된다. 6.5마일, 31마일, 23.5마일, 26마일, 13.5마일 총 100.5마일.

골든시티(Golden City)가는 길 이 날 미주리 주에서 캔자스 주로 넘어가는 기쁨을 만끽했다.
골든시티(Golden City)가는 길이 날 미주리 주에서 캔자스 주로 넘어가는 기쁨을 만끽했다.최성규

페어 그로브(Fair Glove)에서 월넛 그로브(Walnut Glove), 애쉬 그로브(Ash Glove)를 거쳐 에버턴(Everton)까지는 자잘한 언덕이 제법 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작은 둔덕들은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된다.

한창 낑낑댈 무렵 동진(東進)하는 라이더를 한명 만났다. 집 근처 마실 나온 마냥 매우 가벼운 복장이다. 겉보기와 달리 그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출발해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York town)으로 향한다.

"짐도 없이 라이딩을 해요?"
"가족이 그날 그날 목적지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지."

대륙을 횡단하는 라이더들은 각양각색이다. 세상의 온갖 짐을 자전거에 떠맡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지원차량에다 모든 짐을 맡겨버리고 도로를 쏜살같이 질주한다. 든든한 지원군의 힘 덕에 이 아저씨는 하루에 120마일을 주행한다.

사실 이 정도도 약과다. 그는 도중에 괴물 같은 3인조 라이더 그룹을 만났다.

"걔네들은 짐도 없고 잠도 없어."

단 두 시간만 눈을 부치면서 하루에 250마일을 이동한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시작한 여행이 뉴욕까지 채 20일이 안 걸린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그런가 하면 이틀 전 만난 휘태커(Whitaker) 부부는 세월아 네월아 하며 하루 40~50마일만 뛰지 않던가?

주행거리가 50마일쯤 됐을 무렵. 펜스보로(Pennsboro)를 지나자 길이 곧아지며 아주 완만해진다. 속도가 붙는다. 평탄한 길에서는 꾸준하게 15, 16마일의 속도가 나오고 약간 비스듬한 내리막일라치면 19마일로 달리는 맛이 제법이다. 사방팔방은 그야말로 산 하나 없는 벌판. 좌우로 대규모 농장이 펼쳐져 있다.

골든 시티(Golden City)에 도착. 여기서 피츠버그까지는 33.5마일. 도중에 마을은 없다. 가려면 끝을 봐야 한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고민은 짧게. 10초 후 나는 자전거 핸들을 다시 손에 쥐었다.

시간은 4시 반. 평탄한 지형을 한번 믿어 보겠다. 오후 8시 전에 도착할 것. 이제 쉼 없는 페달질만 필요할 뿐이다. 지도는 필요 없다. SR 126번만 쭉 따라가면 된다.

파죽지세다. 앞뒤 모두 고단으로 놓고 밟아댄다. 바람을 가른다. 오토바이 라이더들의 기분이 이해된다.

10마일을 남겨 놓고 또 동진(東進)하는 라이더들을 만난다. 제임슨(Jameson)과 로렐(Laurel).

"일본인이에요?"
"한국인인데요."
"오, 한국! 우리, 파주에서 1년 동안 영어교사로 일했는데."

로렐(Laurel)은 한국음식이 그립지 않느냐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립죠. 그녀에게도 김치는 외로운 한국 생활에서 삶의 낙이 되어주었다. 어딜 가나 현지 음식에 100% 적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캔자스 주 입성 캔자스 주 첫번째 도시 피츠버그(Pittsburg)를 만나다.
캔자스 주 입성캔자스 주 첫번째 도시 피츠버그(Pittsburg)를 만나다.최성규

서로 갈 길이 바쁜지라 길게 대화하지 못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들은 골든시티(Golden City)로, 나는 피츠버그(Pittsburg)로. 이제 마지막 스퍼트다.

5마일 정도 남겨두고 미주리 주가 캔사스 주로 바뀌었다. 지도를 보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뻔했다. 'Welcome to Kansas'라고 적힌 표지판 하나가 적막한 도로에 달랑 세워져 있었다.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서서 마지막 트랙을 도는 마라토너처럼 마지막까지 몰아붙인다. 처음으로 100마일을 돌파했다. 주행시간은 9시간 48분. 평균 속도는 11마일. 수고했다며 나 자신을 토닥여본다.
#미국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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