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정치를 기대하며

등록 2012.10.10 09:17수정 2012.10.1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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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1일 화요일 이명박 대통령은 스웨덴의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의 발전상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차후 1백년이 지나도 (한국경제가 전쟁의 참상으로 부터)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국의 1인당 GDP는 2만 4000달러를 넘어섰고, 무역규모 1조 달러로 세계 7위,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했습니다. … 1960년대 어느 유럽언론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 하지만 대한민국은 전후 독립 국가 중 매우 드물게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취해 냈습니다."

그렇다. 실제로 이코노미스트지가 만든 2010년 민주화지수를 보면 한국이 전 세계 국가 중 20위로서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전후 제3세계 국가 중에서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달성한 유일한 나라이다. 대한민국은 참 자랑스러운 나라이다. 대통령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은 한 세대 전에 비해 낙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픔 또한 유별나다.

'묻지마 범죄'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가출한 아내를 닮았다고 죽이고, 자기 부인과 딸이 가출했다고 지나가던 여성을 죽이고, 폐지 줍던 노인을 때려서 죽이고, 그냥 술 취해서 죽이고… 흉악한 강간살인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집안에서 잠자던 주부, 집 앞에서 아이를 유아원에 배웅하고 돌아서던 엄마, 이제 막 등교 중인 초등학생이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되고 있다. 심지어 집안에서 잠자던 초등학교 1학년 여학생을 이불 채 들고 나와 성폭행하고 목을 조르고 길가에 버려두고 갔다고 한다. 2001년에 비하면 2010년의 살인범죄는 19%, 강간범죄는 91%가 증가했다. 살인과 성폭력의 동기도 우발적인 경우가 각각 46.1%. 43.1%였다. 우리 중 누구도 '묻지마 범죄'에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가슴 아픈 일은 이러한 범죄가 힘이 약한 여성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아동 성범죄가 급증했다. 최근 5년 사이에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가 2.4배 증가했다고 경찰청이 보고했다. 여성가족부의 연구결과를 보면 아동성범죄발생건수의 증가비율이 미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최근에 발생한 엽기적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고 해서가 아니라 실제 심각할 정도로 아동성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여성과 아이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


문득 존 캘혼의 "생쥐의 낙원" 실험이 생각난다. 1968년에 실시된 실험에서 캘혼은 한 면이 101인치이고 높이가 54인치인 "생쥐의 낙원"을 건설하고 여기에 네 쌍의 쥐를 입양했다. 먹이, 물, 온도, 청결 등 모든 생존의 조건은 최적이었다. 이 낙원에서 생쥐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대략 55일 마다 2배가 되었다. 315일째 600마리에 이르렀는데 이때부터 생쥐들 사이에서 이상한 행동들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정상적 생활을 포기하고 묻지마 폭력과 과잉성욕을 즐기는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동성애를 즐기면서 정상적인 부부 쥐의 새끼들을 잡아먹었다. 점차 이 정도가 심해져 마침내 이 생쥐 공동체에서 새끼 낳는 일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560일째 생쥐의 인구는 2200마리로 피크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후로 그 생쥐의 낙원에서는 어린 생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어른 쥐들은 때가 되자 후세대없이 싱글로 곱게 늙어서 죽었다. 생쥐 공동체 또한 소멸되었다. 이 공동체의 소멸을 캘혼은 "두 번째 사망"이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사람의 공동체에서라면 이와 같은 상황이 잘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추정한다. 생쥐의 공동체와 사람의 공동체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공동체는 무엇보다 가치를 중시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으며 공동체적 협력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동물적 생존본능에만 충실한, 그리하여 쉽게 파멸로 가버리는 생쥐의 공동체와 매우 다르다는 주장이다.

아쉽게도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의 공동체 보다 생쥐의 공동체에 더 가깝다. 묻지마 범죄뿐만이 아니다. 급속한 가족해체, 세계 최저수준의 출생률, 세계 1위의 자살률을 들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인가구는 전체 가구의 25.3%이고 2035년에는 34.3%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1980년의 1인 가구 비율은 4.8%였다. 2009년 미국 CIA 자료를 보면 미국의 1천 명 당 출산율이 13.82명(139위)인데, 한국은 8.93명(185위)이라고 한다. 반면에 한국의 자살률은 2010년 인구 10만 명 당 31.2명으로 세계1위였다. 1990년에는 7.6명 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는 지 잘 알 수 있다.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이 갖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 진정으로 대한민국은 생쥐의 공동체를 닮아가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아픔을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들고 있다.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고통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위 1%가 버는 소득이 전체 국민의 16.6%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을 제외한 OECD 주요 19개국의 평균은 9.7% 정도이다. 우리보다 부의 쏠림이 심한 것은 미국(17.7%)뿐이다. 대기업-중소기업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1993년 대기업의 평균연봉은 중소기업 평균연봉의 135%였으나 2010년에는 168%로 벌어지고 있다. 명목임금의 격차는 1993년에 351만원이었으나 2010년에는 1966만원으로 심화되고 있다. 그러니 중소기업에는 21만 명의 노동력이 부족한 데도 취업을 포기하고 노는 니트(NEET)족이 130만 명에 이르고 있다.

어떤 신문들은 기업의 양극화 구조는 그대로 두고, 도리어 그 구조를 찬양하면서, 중소기업에 일하러가지 않는다고 대졸자들을 나무라고 있다. 참으로 양심불량이다. 아마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그런 충고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극심한 양극화는 공동체 내에서 신뢰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원래 이 대통령이 자랑했던 대한민국의 빛나는 업적은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국민적 열망 때문이었다. 이 열망은 교육열을 촉진시키고, 높은 교육열은 질 좋은 노동력을 공급했다. 또한 해외시장진출을 위해 갖가지 특혜로 재벌기업을 육성하고, 위기 때 마다 막대한 국민 세금으로 되살려놓았다. 1972년의 '사채동결령'과 1997년의 '공적자금투입'이 대표적 사례이다.

핵심은 이렇게 노력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만일 "너"만 잘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우리"가 "우리"의 세금으로 "너"를 살려주었겠는가? 그런데 이제 어리석은 몇몇 "너"가 자신의 성공을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몇몇 어리석은 자들이 이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있다. "우리"는 배신당했다. 신뢰는 깨졌다. 공동체의 위기로서 이 보다 더 심한 위기가 어디 있겠는가?

대한민국은 경제를 강조하다가 공동체적 덕을 상실했다. 경제통계로는 낙원이지만 사실은 지옥이다.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지옥이다.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거나 방조하거나 도리어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강조하기 보다는 일등과 경쟁과 거짓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딸의 입시서류를 바꿔치기하려고 짜장면 배달원으로 분장하여 대학에 침입하다 발각된 여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치는 공동체의 아픔을 치유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우리 공동체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상처를 덧나게 만들고 있다. 타협과 공존의 예술을 보여주기보다 독선과 벼랑 끝 전술과 문을 부수는 망치를 보여주고 있다. 정책대결보다는 음습한 흠집 내기와 인신공격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려 한다. 우리의 선거는 가장 좋은 사람을 뽑는 축제의 장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가장 덜 나쁜 사람을 뽑는 그래서 하루빨리 통과하고 싶은 고통스런 의례가 되고 있다.

주권을 가진 국민들의 무능함도 이에 한몫하고 있다. 어느 토론회에서 그 대학의 학생회장이 열변을 토했다. 왜 반값등록금 공약을 지키지 않았느냐? 그러면서도 또 공약으로 내세우는 것이냐?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말했다. "대학생 유권자 여러분은 믿게 해 달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속을 어긴 정당에는 다음 선거에서 투표하지 마세요. 그러면 정당들이 약속을 지킵니다. 약속을 어겨도 표를 주기 때문에 정당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투표할 때에 놀러가지 마시고 투표에 꼭 참여하세요." 한 번 속을 수 있다. 두 번 속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이에게 같은 일로 세 번째 속는다면 속는 사람이 더 나쁘다. 알면서도 속아줌으로써 거짓을 양성하기 때문이다.

몇몇 종교인들이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를 해소하자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참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런 성명서는 낭독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보다 먼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기 바란다. 북한 정권의 세습에는 이를 갈면서 자기 공동체의 세습은 정당화하는 뻔뻔스러움을 먼저 치유했으면 한다. 자신의 공동체는 불공평하고 부정직하게 운영하면서 남에게만 공평과 정직을 강조하는 어른의 뻔뻔스러움이 젊은이들을 절망시키고 있다. 우리는 종교야말로 가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있는 영역이라 믿고 있다.

이 시대의 아픔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능과 뻔뻔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오슬로대학 강연에서 대한민국을 낙원처럼 묘사한 것은 대외용이라 보고 싶다. 비록 집안 내부에서는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다하더라도 외부의 손님들 앞에서 내색을 하지 않는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혹시라도 진정으로 우리 공동체가 낙원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면 캘혼이 만들었던 생쥐의 낙원을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들은 통통하게 살찌고 부드러운 털을 지닌 아름다운 쥐로 늙어가는 동안 공동체는 지금 "두 번째 사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18대 대선은 과연 이 두 번째 사망을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도 함께 기고하였습니다.
#시대의 아픔 #18대 대선 #가능성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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