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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내 앞에 전화기가 놓인 것은 대학을 가서였다. 어느날 집에 가보니 내 방에 전화기가 놓여있다. 아버지께서 들여다 보시면서 말씀하시길, 보증료는 내가 냈으니 전화요금은 니가 내라고 하셨다.
그럴만도 하다. 당시에 PC 통신에 미쳐있던 나는 종량제가 실시되면서 전화선에 연결된 모뎀으로 내는 통신비만 당시 돈으로 20만 원에 육박했다. 보증비도 약 20만 원 가량이었지만 한 번은 내줄테니 나머지 통화료는 니가 해결하라는 말씀이셨다. 결국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의 대부분은 전화요금과 통신요금 내는 데 다 썼다.
그게 내 전화기의 시작이었다. 이후에 서울로 오게 되고 방을 구하자마자 전화기부터 설치했다. 역시나 PC통신을 해야 하니깐 전화선이 중요한 거다. 하지만 늘 집에 없다보니 자동응답기를 설치했다. 물론 그런다고 자동응답기에 음성을 남기는 사람은 당시 연애하던 우리 마나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스팸 전화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후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핸드폰을 지급받게 되었다. 이게 또 웃긴 것은 95년도 당시에 핸드폰은 고가였기에 전철 등에서 울리면 구석으로 숨어서 손으로 가린 채 전철 안의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소곤거리면서 통화를 했었다. 더불어 집의 유선전화기는 더더욱 안쓰게 되었고…. 결혼하고도 거의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었다. 굳이 유선전화가 필요한 경우는 택배 등록할 때 물어보는 전화번호 자리에 기입할 게 있다는 정도?
하지만 그 전화기를 해지 하지 않고 둔 이유는 하나였다. 어머니께서 그 전화로 전화를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특이하게도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시지는 않는다. 이유는 핸드폰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유선전화는 집에 들어왔는지 확인이 가능하시 때문이라 하셨다. 그래서 대부분 전화를 거시는 시간은 저녁에 아버지께서 주무시거나 잠이 안 오실 때인 저녁 10시에서 11시경이었다.
어릴 적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을 부모님은 반대하셨고 이 때문에 서울로 도망치듯이 오게 되었던 나는 이후에도 어머니와 신경전을 계속 벌였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어느 날인가 어머니와 맥주를 놓고 앉아서 울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어머니도 같이 우시면서 평생에 내가 미안한 거 한 가지는 너가 그림을 그리겠다는 걸 반대했을 때였다고 말씀해주셨다. 어머니께 안겨서 펑펑 울었다.
결혼 후에도 종종 낮에도 전화를 하셨지만 점점 더 나이 들어서는 밤에 오는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다.
사촌동생 결혼식 전에 함이 들어온다고 잔치에 다녀오셨다면서 밤에 전화가 오셨다. 술도 한잔 걸치셨는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신랑이 참 좋더라"를 연발하시곤, 그 다음주에 우리 아들이랑 며느리도 간만에 볼 수 있다면서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어머니는 심근경색으로 단정히 침대에 누으신 채 떠나셨다.
모든 절차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물끄러미 전화기를 쳐다보다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아팠다. 이제는 아무도 걸지 않는 전화. 밤이 깊어도 울리지 않는 전화…. 결국은 해지를 해버렸다. 아무도 걸어오지 않는 전화기를 둘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기는 버릴 수가 없었다. 전화기에는 종종 늦게 들어와서 전화를 받지 않을 때마다 남겨 놓은 어머니의 메시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슬에 취해 늦은 밤에는 집으로 걸어오면서 내가 신청해 드리고, 내 손으로 해지해버린 엄마 핸드폰 번호에 전화를 건다. "이 번호는 결번이오…"를 연신 들으면서도 몇 십 번이나 걸어보고 아침에 술에서 깨어나 몇십 통의 발신정보를 확인하고 다시 울곤 했다.
해가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생각나지만, 한편으로는 문득 문득 생각날 거라는 말도 생각난다. 하지만 그 문득 문득이 이토록 뼈가 사무치게 아플 줄은 몰랐다.
엄마는 이제 안 계신다는 사실이 가끔씩 가슴을 너무 아프게 한다. 그토록 말도 듣지 않고, 그토록 싸우기만 하고, 그토록 잘못한 게 많건만. 오늘따라 전화가 걸고 싶어졌다. 그러나 핸드폰에 있는 엄마의 번호는 이제 아무도 받지 않는다. 내 모든 걸 바쳐서 이 번호가 연결이 된다면. 겨울이 시작되려는지 바람이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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