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즈음 정릉 골목길올해 이 길 바닥이 전부 시멘트로 바뀌었다.어렷을 적 이 길에서 사방치기를 하던 기억도 전부 시멘트 밑으로 깔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윤성근
그렇게 해서 낙서 가득한 담벼락과 울퉁불퉁한 길이 예쁘게 변했을지는 몰라도 내 속에 있던 어릴 적 추억 한 덩어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얘길 들어보니까 여기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마을 도서관이나 센터 같은 것을 짓고, 평생학습관에서 강연을 열고, 마을카페와 청소년 쉼터 사업 같은 것도 계획 하는 모양이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하면 마을 문화 일구는 것에 도움이 될까? 여기 사는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까? 결론을 말하자면, 좀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마을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문화는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문화를 일부러 만들 수는 없다고 믿는다. 한 사람이나 단체가 마을에 문화를 만들 수 없다. 설령 무척 괜찮은 어떤 것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화라기보다 '사업성과'라고 표현해야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에 문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과연 그 노력은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앞서 책에서 말한 '도덕적 환상'은 아닐까.
순서가 있다면, 마을 문화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부터 해야 된다. 마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고단한 삶과 그걸 얽매고 있는 사슬을 먼저 없애면 마을 문화는, 제발 만들지 말라고 해도 이미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만드는 것이다.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그 위에 만드는 마을 문화는, 그저 보기 좋고 여러 사람들에게 도덕적 환상을 심어주는 멋진 이벤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꼼꼼한 안내서>는 '참여하고 행동해서 우리가 세상 만들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 내용은 다분히 미국적인 것이라 우리 실정에 맞추기 어려운 부분도 더러 있다. 하지만 대부분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 거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두 사람이라도 뜻이 맞으면 해볼 만한 것들로 가득하다. 또 이렇게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 거의 전부가 한두 번 행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사소한 부분을 건드려서 개선하려는데 의미가 있다. 이것은 마을에 북카페를 만들거나 청소년 센터 같은 걸 짓고 대규모 축제를 기획하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