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정취, 수필과 함께 맛있게 익네

한국의 대표 수필을 통해 느끼는 가을

등록 2012.11.05 11:41수정 2012.11.0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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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의 빛깔은 가을의 색깔이려나? 우리 집 정원에서 가을과 함께 익어가는 감나무
감의 빛깔은 가을의 색깔이려나?우리 집 정원에서 가을과 함께 익어가는 감나무박기용
가을이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해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물방아 돌듯 때가 되면 돌아오고, 또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건만 가을이 되면 우리는 감성적·성찰적 존재를 회복한다. 또 그래야 한다.


아마 자연의 섭리를 인생살이에 비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열적이고 생산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계절을 지나, 찬 바람 옷깃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삶의 끝자락이 언뜻언뜻 비친다. 그래서 가을은 중년의 계절이다.

중년의 계절 가을은 또한 수필의 계절이다. 피천득 선생은 그의 수필 <수필>에서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 여섯 살 중년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중략)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라며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라고 정의하셨다. 고개가 끄덕끄덕, "그래 맞아" 하는 감회가 솟는다.

옛 학창시절 교과서에 수필이 여러 편 실려 있었다. 예컨대 민태원의 <청춘예찬>, 이양하의 <페이터의 산문>, 또는 이희승의 <딸깍발이> 등등. 젊은 피 끓는 시절에 교실에서 오로지 시험을 위해 읽어야만 했던 수필은 감흥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교과서의 수필에는  젊은이들을 향한 계도성·훈시성 내용도 많아서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중년에 접어들면서 간간이 읽는 수필의 맛이 제법 쏠쏠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니 휴식을 취하면서 읽기도 좋다. 큰 기대없이 편한하게 다가서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치유되는 기대 밖의 경험을 하기도 하고 등줄기 서늘한 큰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읽는 내내 우리의 정서를 옭아매면서 흥분과 격정, 한숨과 울분에 휩싸이게 하는 소설은 도수높은 술에 비견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수필은 그저 따듯한 차 한 잔에 불과하다. 그러나 때론 그 차 한 잔이 우리의 삶을 훈훈하게 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타임머신 역할을 하기도 하며, 지쳐 쓰러져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고 싶은 우리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가을을 노래한 수필들의 향연에 여러분들도 발걸음을 들여놔 보는 것은 어떨는지.

① 김남조 <그 수평선을>


이 수필은 "오늘 보고 싶은 건 하늘까지 맞닿은 수평선이다.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할 만큼 둘은 한 가지 색조에 풀어져 시야의 끝머리에 가로누워 있으리라"로 시작해 "내 오늘 보고 싶은 건 하늘까지 맞닿은 수평선이다. 바람도 아닌 것이 안개도 아닌 것이 한 겹 입혀져서 꿈속처럼 아득한 그 수평선이 보고 싶다"로 마무리된다.

센치멘털리즘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때로는 입을 간질이는 솜사탕과 아이스크림도 필요하듯 과도하면 독이 되겠으나 이 가을에는 '감상'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② 김초혜 <이 청정의 가을에>

센치멘털한 감상에 빠질 시간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가을밖에 없다. 왜냐면 오장육부를 다 녹여낼 듯한 무더위에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면 살을 에는 한 겨울에 감상 따위에 눈길을 줄 여유가 있겠는가.

"달이 밝은 가을 밤 창가에 서면 목까지 차 오르는 그리움, 그 그리움은 근원을 모르는 슬픔이다. 글쎄, 그것이 가을의 얼굴인가. 가을의 손짓인가."

김초혜의 가을 처방을 들어보자.

"가을밤엔 일찍 잠들지 말자. 잠 오지 않는 그 밤의 시간에 스스로의 삶을 깊이 생각하자. 그 허망함에 대하여, 그 쓸쓸함에 대하여, 그 적막함에 대하여, 나의 탐욕에 대하여..."

김초혜는 가을의 감상이 쓰잘데 없는 소녀적 취향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아니 오히려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쉼표가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가을을 깊이 앓는 일은 순결한 일이며 고결한 일이다.그 밀도만큼 자신의 삶이 정화되고 맑아진다는 것을 체득하는 길이다."

③ 박완서 <죽은 새를 위하여>

박완서의 수필은 생활 속의 사소한 일상을 수채화처럼 담백하고 투명하게 풀어낸다. 쉽게 읽으며 따라가다보면 은근한 감동에 둘러싸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박완서는 자연친화적으로 얕으막하게 집을 지었지만 먼 앞산을 끌어다 보려는 욕심으로 설치한 커다란 통유리가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인간의 문명을 약간이라도 향유하려는 소박한 욕심마저 자연과의 단절로 이어졌다. 새벽 어스름에 딱 소리를 내며 통유리에 부딪혀 죽은 새 두 마리를 보며, 박완서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놓인 좁힐 수 없는 간극앞에 안타까워했다.

"새가 속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새를 속여 먹은 것이다. 산에다 덫을 놓아 오소리나 멧돼지, 산토끼 등을 닥치는 대로 사냥해... 분노하고 치를 떨 자격이 나한테 있을까. 이런 자괴심조차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얼마 전 <뉴욕타임즈> 인터넷 판 기사를 보다가 박완서 선생의 수필 <죽은 새를 위하여>가 떠올랐다. 이 기사에 따르면, 캐나다 토론토는 철새들의 대규모 남하 경로와 맞물리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해마다 100만에서 900만 마리의 새들이 빌딩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다고 한다.

유리에 비치는 파란 하늘과 쉼터가 되는 나무의 모습이 실제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이 가련한 철새들은 죽음과도 같은 가상현실에 부딪혀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토론토에는 미니멀리즘의 대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물을 비롯해 유리로 화려하게 치장된 빌딩들이 즐비한 현대건축의 전시장이다. 아, 그러나 자연과의 아득한 간격에 현기증을 느낀다. 새 두 마리의 죽음에도 가슴 아파했던 박완서 선생이 이 뉴스를 보셨다면 그 얼마나 인간의 문명에 절망하셨을까.

④ 강인숙 <인도의 나무들>

이 수필은 강인숙의 담담한 인도여행기다.

"그래서 나는 늙어 기력이 쇠잔해지면 인도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그 곳의 강물에 이따금 발을 담그고, 조금씩 먹고 조금씩 사는 슬기를 배우면,죽음을 기다리는 노년의 세월이 아주 평화스러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강인숙은 인도에서는 여름이 되면 모든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장관을 연출하는데, 이는 해충조차 살 수 없게끔 하는 살인적 더위 때문이라고 전한다. 또, 머릿 속에 울리는 명징한 풍경소리를 느낀다고도 했다.

"결국 섬 같기도 하고 뭉게구름 같기도 한 거목들의 위용은 벌레도 살 수 없는 열혈지옥을 참고 견딘 인고의 역정에 대한 신의 보상이었던 것이다."

⑤ 아동문학가 이영희의 <갈잎>

이영희의 가을 인식은 괜스레 감상적이지 않다. 긴 여름 무더위와 태풍과 장마 따위로 시달리면서도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진한 노동을 아끼지 않은 뒤 찾아온 만족스러운 휴식과도 같다.

바람에 굴러가는 낙엽을 보며 감상에 젖고, 비에 젖어 발에 채이는 낙엽과 함께 인생의 처연함을 느끼는 퇴행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가을에 대한 긍정과 안식의 심리가 편안하게 다가선다. 우선 낙엽에 대한 그의 묘사부터 독특하고 신선하다.

"갈잎들이 모여있는 모양이란 곰실곰실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이어서 이영희는 "갈잎들은 지난여름 나무에 매달려 계속된 태풍의 그 많은 거센 비바람의 휘둘림으로부터 이제 평온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나도 이 산에 막 들어설 때의 스산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차분하고 편안해진다"며 "고단한 긴 여행으로부터 허물없고 편안한 내 본래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한다.

⑥ 유경환 <두물머리>

깊어가는 가을 하늘 아래 굽어보는 강물보다 고즈넉한 것이 있을까. 유경환은 그의 수필 <두물머리>에서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에 이르는 산길에서 내려다보는 양수리에 흠뻑 빠져든다.

"만나면 만날수록 큰 하나가 되는 것이 물이다. 두 물줄기가 만나 큰 흐름이 되는 모습을 내려다보노라면, '물이 사는 방법이 저것이로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만나도 격정이 없는 다소곳한 흐름. 서로가 서로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풍광이다."

"조용한 물고기들 삶터에 날이 저물자, 하늘의 별이 있는 대로 다 내려와 쉼터가 된다.만나서 깊어진 편안한 흐름... 얼마나 황홀한지, 어느 시인이 이를 다 전해줄 수 있을까 묻고 싶다."

⑦ 서숙 <눈부신 곳>

서숙은 이 수필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여의도 아파트 단지 주변을 산책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노점상들을 따뜻하면서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1930년대 서울 청계천 일대의 풍속과 다양한 군상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탁월한 필체로 그려낸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이 떠오를만큼 '눈부신' 수필이다.

"꽃파는 아줌마는 좀 떨어진 곳에 화덕을 놓고 ... 어느 여름 옥수수 사려는 여자와 언성을 높였다.옥수수값이 얼마나 비싼데, 오백 개를 삶아 팔아야 오천 원이 남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꾸 더 달라고... 그 소리가 , 내가 잘못 들은 것이지, 한동안 뱅뱅 돌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작고 마르고 등이 몹시 굽은 할머니는... 손바닥만 한 담요 위에 앉아 콩다발을 까며 앉아 있다... 이 작은 할머니가 하루종일 콩을 까고 있구나, 콩을 사야겠구나.그러다가 어느 날,콩 주세요 할머니, 하는 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또 한번 움찔했다... 할머니의 눈은 쌩쌩했다.늙고 불쌍한 작은 할머니가 오갈 데 없어 길에 나앉아 콩을 까서 팔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절대 아니었다. 할머니는 '현역'이었다."

서숙에게 노점상들은 단순히 경쟁에서 밀려난 낙오자 군상들이 아니었다. 한 순간도 쉬지않고 콩을 까는 할머니의 손길은 우리 모두의 안녕을 위해 염주를 돌리는 수도자의 숭고한 손이었다.

"(여의도 증권가의) 공중에서 명멸하는 전광판 숫자들과 일확천금. 그 아래 한 뼘 땅 위에 앉아 그는 하루종일 두 손으로 콩을 까고... 그런 그의 모습이 매 순간 우리를 잠식해오는 거대도시의 추상을 균열시킨다. 작은 지렛대가 되어 우리 삶의 변함없는 착지점이 어디인지 일깨워준다."

⑧ 피천득 <인연>

한국 수필의 고전이 아닐 수 없다.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동경에서 3번 만났던 아사코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격정적인 사랑도 아니요, 절절하고 애잔한 스토리도 아니다. 그저 잡힐 듯 말 듯한 속내가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래서 오히려 여운이 길게 드리운다. 이 수필을 읽으면 그 속에 삽화처럼 끼어든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보고 싶고 ,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을 찾아 읽고 싶어진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늘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⑨ 이어령 <나의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개의 은유>

옴니버스 식으로 엮인 이 수필의 여섯가지 이야기 가운데 '어머니와 귤'은 가슴을 짠하게 한다. 당장 가서 선생을 위로해야 할 것 같은 마음마저 든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인 때(아마 1944년 또는 1945년 정도인 듯)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로 가신 어머니가 병문안 온 손님들이 가져온 귤을 드시지 않고 남겨둤다가 막내아들 이어령에게 보냈으나 그 귤이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찌 그 귤을 먹을 수 있으리! 

"나는 더러 산소에 갈 때 귤을 산다... 그리고  귤을 살 때마다 나는 귤값이 너무나 싼 것에 대해서 절망을 한다. 분노를 한다. 어머니가 머리맡에 놓고 가신 그 귤은 지폐 몇 장으로 살 수 있는 그런 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어머니 회상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러나 늘 내 눈 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시는 어머니, 그러나 언제나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딱딱한 흙의 저 편 밖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어머니, 이 '현존하는 거대한 부재', 그 바다가 바로 나에게 있어서의 어머니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이 갈증의 바다 앞에 서 있다."

여름이나 겨울처럼 강렬하지 않고, 스쳐지나가듯 짧게 머물다 가는 계절 가을. 그래서 더 아쉽고 슬프고 찬란하게 빛나는 가을, 그 소중한 계절, 우리는 충분히 느끼고 있는가.
#수필 #중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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