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가 22일 새벽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2012 후보 단일화 토론회'를 마친뒤 토론장을 나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안철수 단일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이런 뜨거운 관심은 이명박 정부의 지난 5년에 대한 평가일수도 있고 향후 5년에 대한 공포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단일화가 애초의 기대와 달리 국민감동 드라마를 연출하지 못하면서 두 후보의 빠른 결단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높아만 간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후보단일화에만 집중되고 다양한 의제들이 실종된 선거구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약간은 답답한 공방만이 오가는 상황이라면,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아볼 만하다. 지금 선거에서 특히 주목해볼 수 있는 역사는 1987년이다. 우리에게 1987년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1987년에는 6월항쟁으로 광범위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고, 철옹성 같던 군부독재는 6.29 선언으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기만 하면 될 듯했던 '민주주의의 완성'은 양 김의 분열과 이에 따른 저항그룹의 분열, 대선 패배로 인해 꽤 오랜 기간 동안 평가를 유보해야 했다. 강력하게 형성된 저항운동세력과 끈질기게 생명을 연장한 독재권력, 그리고 이 둘 간의 투쟁을 통해 조금씩 진척되기 시작한 '느린 민주화'와 민중운동의 고양은 향후 정치체계 활동을 강하게 규정할 초기 구도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 체제를 총칭하여 '87년 체제'로 부른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치인과 정치학자들의 '87년 체제의 극복'과 '2013년 체제'를 외치고 있듯이, '87년 체제'는 우리 민족, 민주, 민중 운동을 폭발적 고양을 가져온 첫차인 동시에,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기 위해 떠나보내야 할 막차다. 과연 이번 선거가 긴 87년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움을 향해 전진할 수 있을까? 잠시 2012년을 떠나 1987년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두환은 왜 광주에서처럼 유혈진압하지 않았을까 1987년 6월 26일. 6월항쟁이 최고조에 달한 평화대행진이 열린 날이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에서 150여만 명이 행진과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의 최루탄이 동나고 곳곳에서 무장해제를 당하기도 했다. 사흘 후, 당시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는 총 8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했다. 세상에 6.29 선언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6.29 선언은 국민운동본부로 결집된 국민들의 민주화열망이 정권을 강제해 낸 소중한 성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선언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정권과 미국이 저항의 성격을 체제내화함으로써 집권 연장을 꾀한 '그들' 전략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왜 전두환 군부는 6월항쟁을 1980년 광주에서처럼 유혈진압하지 않았을까? 다양한 자료에 의하면 전두환 군부는 적어도 6월 19일까지는 계엄 선포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막아 나선 건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당시 미국은 레이건의 집권 2기를 맞아 대규모 군사개입을 피하면서 정치, 경제, 심리전과 군사전을 병행해 안정적인 친미정부를 구축하려는 '저강도 전략'으로 제3세계 전략 일부를 수정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등의 민주화운동과 필리핀 2월 혁명,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에의 반미투쟁 등으로 인해 미국의 대외정책 일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주한미대사였던 릴리는 계엄을 준비하고 있던 전두환을 찾아가 레이건의 친서를 내밀었다. 이 친서에는 정치법 석방, 권력을 남용한 경찰관 처벌, 언론자유 등 며칠 후 발표될 6.29 선언에 포함된 대부분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범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미국과 군부는 그람시가 이야기했던 일종의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을 추진한 것이다. 수동혁명은 지배계급이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대중들이 정치·경제제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국가권력을 재조직화'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혁명은 지배세력이 대항세력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의 발전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수동적' 측면을 가진다.
주도권을 빼앗긴 국민, 분열된 양김저항그룹을 분열시키려는 미국과 정권의 의도는 적중했다. 노동자들의 7, 8월 대투쟁은 6월항쟁에 참여한 일반 대중들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되었고, 야당은 협상 테이블을 향해 등을 돌렸으며 재야와 운동세력은 합의점 없는 후보전술논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결국 주도권은 국민이 아니라 제도 정당의 지도자에게로 완전히 넘어갔다.
정권의 수동혁명이 효과를 발휘한 데에는 당시 항쟁을 이끌었던 국민운동본부가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한된 목표를 달성한 '이후 전략'을 합의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소주의적이고 온건적인 '직선제 쟁취'라는 목표는 저항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목표 달성 이후에는 정국을 주도할 수 없었다.
물론 이는 단기간에 항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본이 6.29 선언을 '민주장정의 첫걸음'으로 평가하고 '선거혁명론'을 내세우면서 스스로의 전략적 입지는 축소되었으며, 개헌과 대선을 위한 협상주체로서의 지위를 야당에 넘겨주고 말았다.
6.29선언 이후 야당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단일화를 통한 민주세력의 승리'라는 대의명분보다 자신들의 권력욕을 우선시했다. 결국 이들은 운동세력과 제도야당 사이를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있던 운동세력도 분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