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출산한 지 8개월만에 도시농부학교 수강신청을 한 애기엄마,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간난 아이가 종강쯤에는 10개월을 넘겼다.
류허미라
나는 직접 씨를 뿌려 자란 무 싹을 솎아 된장국을 끓이고 쪽파를 솎아 파전을 부치면서 평소에 귀찮게 생각했던 식사준비의 재미를 맛보았다. 덩달아 좋은 음식을 먹는 내 몸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밭을 부지런히 돌보지는 못했지만 씨를 뿌리고 벌레를 잡고, 오줌액비를 만들어 거름을 주는 일을 하고 가끔씩 밭을 둘러보면서 자연이 생명을 키우는 일에 조금씩 친숙해지는 것 같았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있으면 씨앗과 햇빛, 비와 바람, 흙과 벌레가 제각각하고 있는 역할과 노동이 신비롭기만 하다. 시들고 부식되어야 생기는 거름은 씨앗을 키우는 생명력이다. 썩고 부패됨은 죽음이 아니며 그 자체로 생명이다. 다양한 생명의 가치가 살펴지고 존중된다면 죽음은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부패됨은 터부시할 것이 아니다. 씨앗이 싹을 틔움에서부터 거름의 역할까지 이어지는 자연의 노동은 서로 다른 생명이 오랜 세월을 거쳐 모양과 기능을 바꾸어 가며 서로 의존하고 순환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 같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우리 밥상의 먹거리들이 마련되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그것을 키우는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저절로 갖게 된다.
공동체 텃밭 구성원 중 한 명이 밭 한쪽 깊게 박혀 있는 바위를 들어내어 기어코 밭을 일구어 낸 두둑에도 씨앗을 뿌렸는데 좀체 자라지 않았다. 싹을 틔운 어린 갓잎을 또 갈아 엎고 싶지 않고 자라지 않는 것이 안쓰러워서 넉넉하지 않았던 오줌액비 웃거름을 챙겨 뿌려주었다. 두둑에 집단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던 까만 벌레는 어린 잎을 위해서는 분명히 잡아 내 주어야 할 것들이었다.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한 번 더 손길이 닿았던 어린 갓잎이 어느새 짙은 녹색을 띠며 자라고 있었다. 누구도 탐내지 않을 만큼 작게 자랐지만 마음을 조금 쓴 것에 대해 응답이라도 하듯 자라준 갓잎은 내게 감동이었다. 배추와 무, 알타리와 쪽파, 그리고 갓. 작게 자랐지만 자연과 함께 키운 작물을 수확하는 마음은 그래서 감사하고 풍요로웠다.
올가을 나는 초보도시농부였다. 배추 속 벌레를 찾아내는 것도 익숙치 않았고, 보이지 않는 진드기를 잡는 것이 막막했다. 뿌린 씨앗에 게으른 노동을 했기 때문에 신선한 채소를 거져 먹는 듯했다. 내가 뿌리고 돌보지 않은 씨앗을 자연이 키우는 것을 보면서 자연이 내게 실패해도 되는 기회를 주는 듯 너그러워 보이기도 했다. 걱정만 하고 돌보지 않은 밭과 작물에 미안함이 들 때는 가혹한 생존의 필요 때문에 어린 자식이 버거웠을지 모르는 오래전 젊었던 부모의 외로움이 떠올라 우울했다.
다른 소식도 있다. 옆 밭의 도시농부가 키운 배추와 알타리는 큼지막하게 잘 자랐다. 남들보다 조금 어려운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작물을 돌보기 위해 밭을 자주 찾았다고 했다. 수업시간에 기억해 두었던 살뜨물 발효액으로 웃거름을 주기도 했다며 경작경험을 나누었다. 잘 키운 알타리를 미리 수확해 김치를 담궈 도시농부들의 축제인 추수감사제에도 내놓았다. 시원하게도 잘 익은 무농약 알타리 김치를 나눠 먹으며 도시농부들은 함께 즐거웠다. 정성을 들여 잘 키운 작물을 수확한 도시농부와 작게 자랐지만 기쁘게 수확한 도시농부가 서로 키재기를 할 이유가 없이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동시에 배웠으리라.
인간사회가 어떻게 개입하느냐의 문제이겠지만 자연의 노동이 가난한 농촌에 그리 너그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도시나 농촌이나 아직까지 생존을 위해 억지 노동을 해야 하는 운명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몸을 움직인 노력에 비해 감상이 비대한 것이 억지스럽게 생각이 되어 이 감상에 마침표를 찍는 데 한참이 걸렸다. 어쨌든 텃밭에 놀러다니며 도시 삶의 껍데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와 쉼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올 가을 나에게 매우 의미있고 중요한 수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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