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해상군사경계선 설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지난 1977년 8월 1일 해상군사경계선 설정에 관한 북한의 발표는 우리 정부의 영해법 제정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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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정부당국은 1953년 휴전협정 체결이후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설정한 NLL에 대하여 '실질적 해상경계선', '북방한계선', '남북해상불가침경계선' 등의 모호한 용어를 혼용하여 왔다. 최근에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서해의 생명선', '국토선'이라는 용어도 사용했다. '영토선' 내지는 '영해선'이라는 명확한 국제법적 용어 대신에 이런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을 추적해보자.
서해상의 영해문제가 모호하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7년 제정된 영해법에서 기인한다. 영해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이후에 작성된 국회 외무위원회의 '영해법안 심사보고서'에 그 문제가 적나라하게 지적되어 있다.
국회 외무위원회 김병훈 전문위원이 작성한 심사보고서에 따르면 "영해법의 실질적이고도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본 영해법안의 초안에는 해협, 기선, 접속수역, 인접국 또는 대향국과의 경계선이 명시되어 있지 않거나 구체적 언급이 회피되어 있어 본 영해법안으로는 어디까지가 우리나라의 영해이고 타국과의 경계는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없음"이라고 지적했다.
즉, 법안이 제출됐지만 이 법안만으로는 우리나라의 영해가 어디까지 설정하는 것인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국회 외무위원회 법안심사과정에서도 지적되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서인석 의원은 외무부장관에게 "영해도안(領海圖案)을 내일까지 한 부 만들어 내주실 것, 그리고 주변국가의 영해도 효력을 발생한 해도를 내일까지 내주실 것"을 요청하는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영해법은 지난 1977년 10월 5일 정부제출 법률안으로 국회에 제출되어 국회 외무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같은 해 12월 31일 제정되었다. 영해법안이 갑자기 국회에 제출된 배경에는 그해 8월 1일 북한이 이른바 해상군사경계선 선언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은 국회에 출석한 박수길 외무부 조약국장의 국회 외무위원회 법안설명과정에서 확인된다.
박 국장은 영해법안에 대한 외무위원회 설명에서 "77년 8월 1일에는 그들(북한)도 세계추세에 따라서 소위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참고적으로 드릴 것은 동일 그들은 경제수역을 지키기 위해서 군사경계선을 설정한다고 발표"했다고 언급함으로서 영해법안 제출이 북한의 해상군사경계선 선포와도 연계되어 있음을 밝혔다.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영해의 영역을 구체화하지 못한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은 시행일자를 구체화하는 내용만 수정한 상태에서 통과됐다. 1977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 영해법안이 상정되자 야당인 신민당의 엄영달 의원은 법안 반대토론을 신청하여 법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특히 엄의원은 영해법안에 서해 5개 도서문제에 대해 법안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그의 국회 본회의 발언내용을 인용해보자.
"북괴는 서해도(西海島)의 연안해를 그 위치상으로 보아서 북괴 측 육지에 가깝다고 해서 그 인접수역이 그들의 영해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 판국인데 왜 우리 측은 서해 5도에 관해서 영해법안 속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말입니까? (중략) 왜 우리 정부는 대북괴 관계에 있어서도 대일본 관계에 있어서도 이렇게 소극적이며 이렇게 애매한 태도만을 계속 취해야 한단 말입니까? 본 의원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입니다."엄 의원의 이러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정일권 국회의장은 토론종결을 선포하고 이의 여부만 물은 상태에서 가결을 선포했다. 엄 의원의 지적은 이후 해양법 학자들의 학문적 평가에서도 매우 정당했음이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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