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4동 신트리공원에 있는 박영근 시인 시비. 시 ‘솔아 푸른 솔아’가 새겨져 있다.
심혜진
이 시집으로 그는 이듬해인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인 그에게 두 번째로 주어진 영광스런 순간이었다. 2004~2005년에는 한 대학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그와 오랜 친분을 나눈 이들과의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2003년 그가 믿고 따르던 선배 정세훈 시인이 지병 때문에 거처를 김포로 옮겼다. 2005년에는 그와 한 동네에 살면서 자주 왕래한 고향친구 허정균씨마저 서울로 이사 갔다.
정 시인은 "떠난다는 말에 허망하게 바라보던 박 시인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시인은 어딘가 모르게 점점 몸이 야위어 갔다. 2005년 11월, 인천 남동구 용현동에 있는 친누나의 집 근처로 이사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병색이 짙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이라도 할라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성효숙씨는 2006년 4월, 시인을 만났다. 성씨는 "걷기도 힘든 몸으로 저녁밥 반 공기를 비운 후 그가 형형한 눈빛으로 '노동시' 이야기를 꺼냈다"고 했다.
"그때 내가, '이제 당신은 노동시 안 써도 되니 존재에 대해 써보라'고 했다. 시인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은 시, 노동시였다."2006년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시인은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지만 치열했던 48년의 생이 끝났다.
전집 발간과 문학관 건립은 남은 과제살아서 네게 술 한 잔 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살아서 네 적빈의 주머니에 몰래 여비 봉투 하나 / 찔러 넣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몸에 남아 있던 가난과 연민도 비우고 / 똥까지도 다 비우고 / 빗속에 혼자 돌아가고 있는 / 네 필생의 꽃잎을 생각했다 /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 목숨과 맞바꾸는 못난 꽃 / 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 못난 꽃 (도종환 시 '못난 꽃' 중에서)그가 세상을 뜬 후, 많은 문인과 평론가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썼다. 시인 도종환은 '못난 꽃'이란 시를 썼고, 판화가 이철수는 '드문드문, 몇 해 만에 한 번씩 만나면 제 말랑말랑한 판화를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면서도 넉넉한 웃음으로 슬몃 넘어가주던' 시인의 일화를 적은 판화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성씨를 비롯해 그의 선·후배와 동료들은 인터넷에 '박영근 시인 추모카페'(
http://cafe.daum.net/poemwindow)를 만들고, 해마다 기일이 되면 추모제를 여는 등 그와의 추억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9월 신트리공원에 세운 시인의 시비는, 지난해 9월 홍미영 부평구청장이 한 행사장에서 '박영근 시비를 세우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후 시비 건립은 빠른 속도로 추진됐다. 김이구 '창작과비평' 이사와 고향친구인 허정균, 그의 문학 동료였던 서홍관·박일환 시인, 그리고 성효숙씨 등 8명이 집행위원회를 구성했고,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비 세울 곳을 수차례 답사하고, 시비로 사용할 돌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시비에 새겨진 '솔아 푸른 솔아'는 성효숙씨가 시인의 육필 원고에서 하나하나 글자를 모은 것이다. 시비 제막식이 열린 행사장은 각지에서 온 문인과 유족 등 2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차분하면서도 마냥 엄숙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행사가 진행됐다.
그의 곁을 지키는 이들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이야기한다. 절판되는 바람에 쉽게 구해 읽을 수 없는 그의 시집을 다시 출간해, 박영근 시 전집을 발행하는 일이다. 가장 많은 시가 탄생한 장소인 부평4동 집을 문학관으로 만드는 것도 과제다. 그의 삶을 지탱한 '노동시'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낮고 분명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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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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