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2012년), 어느 반에 수업을 하러 들어갔을 때의 광경. 아이들이 가장 생기 있는 점심 전 교시였는데도 모두 ‘좀비’가 되어 엎드려 있다. 이 가공할 대한민국 교실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은균
이러한 점을 따르는 한, 학교에서 배출되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노예'와 다름 없다. 학교는 학생들을 주인에게 철저히 예속된 노예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주입해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학생들은 묵묵히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사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는 이 '상식'은, 인류가 문명을 만들어 진보하기 시작한 저 먼 옛날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이다. 실상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있기는 할까?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불과 200년밖에 되지 않은, 대단히 많은 문제 투성이를 안고 있는 만들어진 제도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고 한계가 분명하다면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혁파하거나 뜯어고칠 수 있는 것이다.
교사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는 이 '상식'의 문제를 따져 보자. 교사가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가르칠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학교 교육의 시원에 있는 피히테의 프로젝트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학생을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노예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기존 질서나 체제에 반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새' 것이 아니다. 완고하게 보수적인 교사에게는 기존의 것을 살짝 바꾼 '약간 새로운' 것조차도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결국 학생을 노예로 만드는 교육은, 그리고 이를 위해 교사가 가르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진보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르침으로는 자기 변화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변혁은 꿈조차 꿀 수 없다.
교사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은 기존 체제를 굳게 한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교육이 발 붙일 곳은 찾기가 쉽지 않다. 학생들은 교사의 치밀한 조작에 따라 작동되는 기계와도 같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바꿔 말하는 일은 힘들다.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사가 가르침이라는 굳은 옹벽의 틀 속에 갇혀 있는 한 학생들이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는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실상 교사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내 말을 가르치지 말자는 주장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나는 교사의 가르침이 교육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현실에 딴죽을 걸고 싶은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만으로 교육이 완성된다면 학교며 교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른바 '듄(ebs)'을 최대한 활용하고, 완벽한 인강 시스템을 갖춘다면 각자 자신의 방안에서 모니터만 들여다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현실이 그렇지 않음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교사는 알지도 못하는 그 누구, 가령 교육(교과) 과정 입안자나 교과서 집필자 등이 정해준 무언가를 가르친다. 그것이 어떤 의의가 있으며, 교실 현장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많은 교사는, 으레 자신이 그렇게 가르치면 아이들은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타협이란 없다.
학생들은 두 부류다. 한 부류는 교사의 가르침을 무작정 받아들인다. 물론 그것은 대부분 지식에 대한 사랑이나 배움을 향한 열망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런 '무작정'이 성적과 대학 입학에 유리해서다. 또 다른 부류는 교사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이들에게 교사의 가르침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것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그리고 삶에 별다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에도 성적의 압박을 느끼는 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성적의 현실적인 영향력과 이를 중시하는 교사, 부모 등의 시선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교사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배움에 대한 관심이나 흥미를 잃어가면 갈수록 성적은 그 어떤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가르침을 거부하고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아이들은 사토 마나부 교사의 말마따나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글을 끝맺자. 교사는 가르치는 전문가가 아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교사는 가르치면서 배우는 존재여야 한다. 교사가 가르치는 전문가가 되면 학생이 소외된다. 주체가 되지 못하고 대상으로 전락한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교사는 떠먹여주고 학생은 그저 받아먹기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이것은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식으로 말해 학생들에게 '소화제'나 '영양소' 같은 것이다. 그러니 좋은 게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소화제나 영양제는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나 좋은 일이다. 위장 기능이 튼튼하여 탁월한 소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소화제는 불필요한 약물 남용의 원인이 될 뿐이다. 영양이 풍부한 이에게 주입되는 영양제는 독으로 기능하지 않겠는가. 교사의 가르침이, 그리고 가르칠거리가 모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교사가 가르치면서 배우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춰야 한다.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배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와 학생의 대화와 밀접한 소통 등의 상호 작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교사의 입에서는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9~1988, 미국 소설가)의 소설 <대성당>에 나오는 주인공이 맹인과 함께 눈을 감은 채로 성당 그림을 그린 후 내뱉은 짧은 말,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와 같은 감격스러운 대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자! 그들과 단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이름을 불러 그들의 입에서 단 한 마디의 말이라도 나올 수 있게 하자. 새 학년 새 학기를 맞게 되면 학생들 이름부터 외우자. 아직은 개학이 먼 이 한겨울에 뜨겁게 외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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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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