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장순금 여섯 번째 시집 <골방은 하늘과 가깝다> <골방은 하늘과 가깝다>(문학아카데미)를 읽고 있으면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골방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아카데미
골방에선 일생을 걷던 내 발이 보이고 감춰둔 발톱도 보인다 더 크게 더 자세히, 갈라지고 튼 뒤꿈치로 걸어온 길, 길의 튼 살이 보인다
무념무상의 얼굴로 골방이 나를 본다 나도 깃털처럼 앉아 골방의 복부를 연다 골방은 침묵하는 수다쟁이, 내가 하지 않는 말까지 다 말해 버린다 나는 몸을 숨긴다
골방 속에서도 또 몸을 숨기는 나의 골방몸에 꼭 맞는 골방에 꿇어앉으면 꿇어앉은 당신이 보인다 - 시집 <골방은 하늘과 가깝다> 79쪽, '골방은 하늘과 가깝다' 몇 토막 이 시에서 말하는 골방은 시인 자신이다. 시인이 골방에 들어가는 순간 골방이 되기도 하고, 그 골방이 시인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골방은 시인이 이 세상살이에 지칠 때마다 찾는 포근한 둥지이자 자화상이다. "몸에 꼭 맞는 골방에 꿇어앉으면 꿇어앉은 당신이 보"이는 것도 골방과 시인이 한몸이기 때문이다.
시인 장순금이 새해에 접어들자마자 펴낸 여섯 번째 시집 <골방은 하늘과 가깝다>(문학아카데미)를 읽고 있으면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골방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골방은 사람 마음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생각의 방'이기도 하고,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만나는 삼라만상이기도 한다.
이 시집이 <골방은 하늘과 가깝다>라는 제목을 단 것도, 이 세상을 품고 있는 저 하늘도, 어쩌면 골방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시에 나오는 그 어떤 이름은 이름 그대로 실제로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늘 다른 빛깔을 띤다. 시인이 그 이름을 어떻게 불러주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빛깔이 무지개로 찬란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춥고 캄캄한 어둠으로 다가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제1부 '흑염소, 은하수 건너가는', 제2부 '붉은 방', 제3부 '나무 코끼리', 제4부 '사람의 아들'에 시 62편이 "백지의 살을 뚫고 / 내 이름에 문신"(<프린트하다>)을 또박또박 새기고 있다. '평화고물상' '그 남자의 연애법' '뻥 할아버지' '내 탯줄 인제 끊겼다' '지옥과 악수하다' '눈물밥' '흉터' '비밀번호' '맨밥' '그의 혀는 늘 햇빛의 문자를 꿈꾼다' '희망 감옥' '사람의 아들' 21~24가 그 시편들.
시인 장순금은 '시인의 말'을 통해 "시간이란 말이 절실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 까닭은 "야생으로 시간이 떠돌 때에도 시신(詩神)"이 시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싱싱하게 자란 잎맥 하나가 골방 창문으로 하늘과 내통하며 시간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도 그 절실했던 시간이었다.
시를 제 살 속에 박고 사는 시인목욕탕에서 허리에 문신한 여자를 보았다살이 잉크를 빨아먹고 나비가 되었다나비 앉은 자리에서 허리로 날개가 돋았다집으로 돌아와 프린트기 전원을 켜고 시 한 편을 클릭했다백지가 온몸으로 잉크를 빨아들여 한 획씩 문신을 박아 나왔다시 한 편이 백지의 살을 뚫고내 이름에 문신을 새겨 나왔다시를 제 살 속에 박고 사는 시인은 나비다허리 동그랗게 고요를 가두었다 창공을 오르는나비 날개다목욕탕에서, 살에 프린트한 시 한 편이 지나갔다 - 시집 19쪽, '프린트하다' 모두 상상력이 아주 돋보이는 독특한 시다. 목욕탕에 갔다가 나비 문신을 한 여자 알몸을 바라보면서 "살이 잉크를 빨아먹고 나비가 되었다"고 여기는 시인. 그 시인은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쓴 시 한 편을 프린트로 뽑는다. 그 시도 그 여자 알몸에 새겨진 문신처럼 "백지가 온몸으로 잉크를 빨아들여 한 획씩 문신"을 새기고 있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살에 시를 문신한 그 종이는 "시를 제 살 속에 박고 사는" 시인이다. 시인은 문신이 된 그 시를 나비에 빗댄다. 왜? 시인을 떠난 시는 나비처럼 날개를 펴고 이 세상 곳곳을 팔랑거리기 때문이다. 시인 살에 이 세상을 프린트 하는 것이 시라고 여기는 시인 장순금. 그래, '돈도 안 되는 시'는 어쩌면 시인 살에 새기는 문신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12일, 토요일 밤에 이 시를 읽은 나도 13일 낮에 목욕탕에 갔다가 온몸에 용 문신을 하고 있는 남자를 봤다. 그 문신도 그 남자 살이 잉크를 빨아먹으면서 용이 돼 몸을 움직일 때마다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 글쓴이 머리를 반짝 스쳐 지나갔다. 우리들이 꿈꾸는 희망도 이 모진 세상살이에 지쳐 문신으로만 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 말이다.
장순금 시인은 아주 여리고, 몹시 작고, 하찮은 것 같은 사물에 따스한 눈길을 툭툭 던진다. 시인은 아파트 뒷길에 생긴 고물상을 바라보면서 "잊혀지고 버려진 것들이 하나씩 서로 곁을 내주더니 / 뒷길도 한통속"이 되면서 "금간 것들끼리 서로 문지르며 평화 한 줌 나눠 갖는다"('평화고물상')고 생각한다. 하찮은 것 같은 고물들도 그냥 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인이 이 세상 그늘진 곳을 껴안는 시편들은 이 시집 곳곳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툭툭 내던지고 있다. "반평생을 뻥치다, 헛살았다고 / 느즈막에 진짜 뻥튀기며 산다는 뻥 할아버지"('뻥 할아버지')나 "길들여진 발과 잘 놀던 헌 구두 생각이 났다"('오래된 사진'), "'화장중' / 붉은 글자를 저승돈 삼아"('영락공원'), "나도 그 하수구에 / 누더기 껍데기 하나, 내던지고 왔다"('껍데기') 등이 그렇다.
너를 챙기는 오늘, 비로소 '붉은 증인'을 알았다 서랍 속에서 살 땐 모른다너를 챙기는 오늘, 비로소 알았다 손가락만한 나무 조각 속에 새겨진 여름날 번쩍인 번개의 화인제 몸을 찍어낸 도끼날의 서슬 꽝! 내리찍는 순간 한줄기 눈물처럼 단번에 정리한 삶의 경계 - 시집 58쪽, '도장' 몇 토막 요즘 웬만한 서류는 도장 대신 사인으로 처리하지만 중요한 서류에는 반드시 도장이 필요하다. 시인은 서랍 속에서만 뒹굴고 있던 별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던 그 도장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붉은 증인"이 되는 것을 바라보며, '삶의 경계'를 느낀다. "내 것이 네 것이라 맨살에 찍었던" 그 붉은 도장이 이 험악한 세상살이를 쏘옥 빼닮았다는 것이다.
숟가락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기 위해 끼니때마다 들었던 그 숟가락에는 "신념도 피붙이도 돌려 세운 / 차가운 스테인레스 단단한 침묵을 한 생애 / 질기게 물었던 입"('숟가락')이 묻어 있다. 이 세상을 "통뼈처럼 살고 싶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관절이 스스로 나사"를 풀기 시작하고 "떨려나간 뼈들이 나를 버린다"('환골탈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