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2002년부터 1000회가 넘는 '즉문즉설' 방식의 대중강연을 통해 남녀노소와 종교·이념을 뛰어 넘어 국민 멘토로 활동하고 있는 법륜스님. 즉문즉설 해답의 기준은 바로 <금강경>이었다.
정토출판
법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하니 만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95쪽)<금강경> 제5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초심자가 얼핏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법륜스님은 당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해주었다. 마치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자비롭게 설명해주듯이 말이다.
일례로 책 속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성추행을 당했던 마음의 상처 때문에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웅크리고 있는 아가씨가 있었다. 성추행으로 자기 몸이 더러워졌다고 괴로워했는데, 법륜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가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일어난 사건은, 내가 내 몸이 더럽혀졌다는 한 생각을 일으켰다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더러워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더러워졌다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오랜 시간을 꿈속에서 살았구나!' 그렇게 탁 깨달으면 이제까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406쪽)
이는 성추행한 남자가 죄가 없다거나 그에게 죗값을 묻지 말아야 한다거나, 그를 처벌하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법대로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법륜스님이 <금강경>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괴로움을 여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한없이 무거웠던 등짐도 눈을 뜬 뒤에는 조금도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 짐은 본래 짐이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학벌이 낮다, 병이 들었다, 이혼을 했다, 자식이 없다, 아기를 못 낳는다, 사업에 실패했다, 실직을 했다, 어떤 일도 다 그렇습니다. 눈곱만큼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를 더럽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408쪽)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내용은 법륜스님의 많은 경험담과 함께 흥미롭게 반복된다. 경전 강의라고는 하지만 마지막 장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다.
평소 절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었던 <금강경>은 한자로 된 아주 어렵고 투박한 용어들뿐이었다. 특히 <금강경>에는 '상을 여의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예전부터 도대체 이 '상'이란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법륜스님의 설명을 통해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상이란 나다-너다, 깨끗하다-더럽다, 좋다-나쁘다 등등 마음에서 일으켜 모양 지은 관념을 말합니다. 상을 여읜다는 것은 세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 나와 다른 의견과 주장, 나와 다른 종교와 신앙, 나와 다른 사랑의 방식도 모두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상을 여읜 것입니다. (67쪽) 우리는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는 설명이다. 안경을 벗어야만 그때까지 안경을 끼고 살았음을 알게 된다. 상에 집착했을 때 '내가 지금 상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상이 상 아닌 줄 아는 것이다. 참 쉽고 명쾌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그 문답의 기준은 바로 <금강경>'즉문즉설'을 통해 대중들의 생활 속 고민을 해결해주었듯이 구체적인 상담 사례들이 곳곳에서 나온다. 자세히 읽어보면 '즉문즉설, 그 문답의 기준은 바로 <금강경>에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가령 이런 상담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시장바닥을 헤매면서 억척스럽게 살아서 두 아들을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보내고, 아들을 따라 미국 땅에 살게 된 할머니가 있었다. 미국 땅에 와보니 말도 통하지 않고 사는 풍속까지 눈에 거슬려서 답답하고 견디기 어려웠다. 자식들이 출근하고 나면 텅 빈 집안에 혼자 남아 감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은 어머니의 역정을 괜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급기야 아들들에게도 서운한 마음이 생기고 '저놈들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그러자 법륜 스님은 이렇게 말해줬다.
"영 자식이 미우면 차라리 '저놈의 자식, 남이다'라고 생각하세요. 왜냐하면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은 우리가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잖아요."(89쪽)이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기도하던 할머니는 크게 깨닫는다. 아들이 남으로 다가온 순간 눈물이 솟구쳤다. 그토록 집착하던 아들이 완전히 남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원망과 미움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자 먹여주고 입혀주며 용돈까지 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다고 한다. 환경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때부터 할머니는 절에서 봉사하며 행복한 나날을 살게 되었다. 법륜스님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기쁨의 눈물을 함께 흘렸다고 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185쪽)이 구절은 <금강경>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사구게(경전의 핵심을 네 구절로 나타낸 게송)다. 위의 할머니 이야기를 통해 이 사구게가 담고 있는 뜻이 명쾌하게 드러난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즉 상대에게 바라는 마음이 곧 나에게 큰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법륜스님은 이렇게 강조한다.
길 가는 사람이나 이웃하고는 싸우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가족하고는 허구한 날 싸웁니다. 이 역시 가까운 사람에게는 '나한테 이만큼은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가까울수록 그에게 바라는 수위는 높아지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괴로워합니다. 그러니 내가 답답하고 괴로운 이유는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내 마음 때문입니다.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면, 내는 그만큼 내 괴로움이 줄어듭니다. 이렇게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을 돕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면, 그것이 바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299쪽) 책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의미는 더욱 분명해지고, 헷갈리던 부분은 뒷부분에서 다른 비유와 사례로 또 한 번 강조해줘서 명료해지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내 마음엔 평온함이 가득했다. 그동안 남들을 돕겠다는 자원봉사를 10년이나 했으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왜 힘들어했는지 몰랐는데 이제 비로소 알았다.
자원봉사 10년, '인정' 바라는 마음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