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승씨 고백문, 눈물 나는 이유가 뭘까요?

26일, 102일 철탑농성 희망버스에서 최병승씨가 낭독한 내용을 들으며...

등록 2013.01.29 10:58수정 2013.01.2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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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탑 새해 인증샷 찍는 최병승 씨 2013년 1월 1일 새해 아침 철탑에 올랐습니다. 두사람은 새해를 등지고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철탑농성 77일차.
철탑 새해 인증샷 찍는 최병승 씨2013년 1월 1일 새해 아침 철탑에 올랐습니다. 두사람은 새해를 등지고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철탑농성 77일차.변창기

최병승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지난 26일 토요일 저녁 8시경. 철탑농성 100일을 넘기면서 전국 희망버스가 다시 왔습니다.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현대차 울산공장 정문 앞에서 대법판결 이행 촉구 규탄집회를 하고 5km 넘는 거리를 걸어 철탑에 다시 모였습니다. 시민단체가 준비한 국밥 한 그릇씩을 먹은 후 위로문화제를 했었습니다.


최병승씨는 현대차 울산공장 1공장에 2년 넘게 다녔고 구속, 수배, 손배가압류를 당하면서 6년째 법정소송을 이어갔으며 대법원에서 지난 2010년 7월 22일 승소 판결을 받아내게 됩니다. 3승제인 우리나라 법률상 다시 고법에서 판결 나고 2년 후인 2012년 2월 23일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을 받아냅니다.

'현대차는 불법파견 주식회사다. 최병승은 파견법 6조 3항에 의거 이미 정규직으로 보아야 한다.'

정규직 노조는 많은 논란 끝에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정으로 승소한 최병승 씨에게 조합원 자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2월 하순에 판결 난 대법원 판결도 현대차 앞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8개월 후 그는 조용히 현자노조 사무실을 박차고 나옵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조 천의봉 사무국장과 함께 철탑에 올라갑니다. 그것이 지난해 10월 17일경 밤 9시 무렵이었습니다.

현대차는 건장한 경비요원을 올려보내 강제로 끌어내리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었지 못 내려가겠다"고 버텼고 그렇게 시작된 철탑농성은 1월 29일자로 105일째를 맞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 중 13년 1월 1일 철탑농성 77일차. 경향신문 기자가 사다리차 빌려 올라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작은 비닐천막은 비좁았습니다. 밤엔 얼고 낮엔 녹아 물이 떨어졌습니다. 힘든 농성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 중13년 1월 1일 철탑농성 77일차. 경향신문 기자가 사다리차 빌려 올라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작은 비닐천막은 비좁았습니다. 밤엔 얼고 낮엔 녹아 물이 떨어졌습니다. 힘든 농성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변창기

전국에서 다시 희망버스가 온다고 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면서 써 내려간 흔적이 다분한 내용이었습니다. 2004년경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가 생겨나면서 저랑 같은 시기에 조합활동을 시작한 최병승씨. 그가 겪었을 고통의 세월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버스 동지들! 이렇게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음 속에는 꼭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2004년 11월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 쟁대위가 열렸고, 저는 '천막농성과 3일간의 잔업거부'를 투쟁계획으로 제출했습니다. 3일만 우리가 잔업거부한다면 현대자동차가 불법파견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제출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많은 논란 끝에 투쟁이 결정되었고, 2005년 1월 투쟁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3일은 지나갔고, 답답했던 한 동지가 몸에 '신나'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결의했던 5공장 동지들은 파업을 이어 갔고, 제가 있던 1공장 동지들은 바지사장이 전달한 경고장에 숨 죽여 버렸습니다. 그로인해 100여 명의 동지들이 해고되었습니다"


당시 모든 공장 비정규직 노동자가 현대차 본관 앞에 노숙농성을 하기로 했었습니다. 5공장이 선봉에 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최병승씨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본관 앞 천막농성장에서 1공장까지 2분이면 볼 수 있는 조합원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 의정부 입구 옆 화장실로, 때로는 커피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한 잔 먹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투쟁하는 5공장 동지들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현장을 조직할 자신이 없어 투쟁하는 동지들이 현장에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5공장 조합원들은 의연하게 250일 이상 투쟁을 이어 갔고,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산화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삶을 책임지지 못했고, 2005년 투쟁하자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장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천막을 접고 떠나는 동지들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남아있는 것밖에. 그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1월 1일 그날 사다리차로 내려가는 우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최병승,천의봉 씨. 그들은 다시 무료한 나날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1월 1일 그날사다리차로 내려가는 우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최병승,천의봉 씨. 그들은 다시 무료한 나날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변창기

저는 그가 투쟁을 회피한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의 고백은 그날의 심정을 가슴 아프게 저를 후벼 팠습니다. 그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주변의 많은 분도 같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5공장 입장에서서 그때 일을 생각했었습니다. 1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또 다른 현장탄압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었음을 짐작하지 못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생각이 너무도 짧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상처가 아물기 전 2010년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2010년 CTS 파업 24일째 저는 체포영장이 떨어졌고, CTS파업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집행유예가 1년 11개월이나 남아있었기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실제는 몇 년을 또 철창에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날 조합원들은 눈물을 머금고 점거파업을 풀고 CTS를 내려와야 했습니다. 파업을 철회했다는 억울함보다는 구속이 두려워 또다시 동지들을 등져야 했던 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많이 울었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복받쳐 올랐습니다. 글을 읽다가 끊어질 때 철탑 아래서는 "힘내세요. 최병승 동지"라는 목소리로 합창했습니다. 2005년 후 그는 수차례 수배와 구속을 반복하면서도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대표로 해서 진행한 법정소송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2005년 후 2010년 3월 중순 현대차로부터 정리해고 당할 때까지 저는 희망을 잃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다 맥없이 정리해고 당하고 말았던 겁니다.

2012년 5월 중순 저는 현대차 노동조합 간부의 도움으로 최병승씨를 만나러 노조사무실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지난날 저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지나 않은지 그래서 저와 이야기를 피하면 어떠할까하는 고민도 하면서 그를 만나러 갔었습니다. 저는 당시 비정규직 노조 게시판에 그를 비판하는 내용을 많이 올렸었습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그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이 넓었습니다. 저를 반갑게 맞아주고 다른 신문기자에겐 차마 말하지 못한 내용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정몽구를 구속하라! 1월 26일 2000 여명의 희망버스는 불법파견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대차를 울산공장 정문 앞에서 규탄하고 있습니다.
정몽구를 구속하라!1월 26일 2000 여명의 희망버스는 불법파견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대차를 울산공장 정문 앞에서 규탄하고 있습니다.변창기

"100일째 되던 날 함께 농성하고 있는 의봉이가 "형님, 솔직히 60~70일이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네요" 참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이 투쟁을 승리하지 못한다면 또 누군가 해고되고, 수배되고, 구속되고, 손배가압류에 힘들어 할 것이고, 의봉과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힘들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제가 겪었던 그 끔찍한 고통과 무게를 의봉이 짊어지고 가야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0년 CTS 25일 파업 일수 보다는 조금 많이 버티자'고 설득하여 올라온 저는 또 어떨까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정말 이기고 싶습니다."

좁은 철탑위에서, 엄동설한 철탑위에서 100일 넘기는 그의 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현대차의 노무관리 방식에 대해 비판도 했습니다.

"노동 관련 행정기관이 2004년, 2011년, 2012년 줄줄이 '불법파견이며, 정규직이다'고 판정하고, 사법기관이 2007년, 2010년, 2012년에 "현대차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고, 2년이 경과한 노동자는 정규직이다"고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동차는 아직도 사내하청노동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런 상관없다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현대자동차 명찰을 단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계속 물어봅니다. 2차 업체 현대세신, 태형산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도, 2차 업체 임금인상과 성과금 문제를 해결한 것도 현대자동차였습니다.

1차 업체는 어떻습니까? 파업하면 실무교섭과 본 교섭 테이블 앞에서 파업 자제를 요청하는 것도, 제시안을 내는 것도 현대자동차였습니다. 손해배상을 하는 것도, 형사 고소고발을 하는 것도, 징계 대상자를 선정하는 것도 현대자동차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내하청노동자와 상관이 없단 말입니까?"

그는 현대차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변하기도 했었습니다.

"10년이 넘게 현대자동차를 성장시킨 사내하청노동자들이 10년 동안 당신들이 불법파견을 저질렀고, 대법원이 판결했으니 불법으로 차별하고 착취한 모든 사내하청노동자에게 사과하고,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요구가 무엇이 잘 못되었습니까?

왜? 10년 동안 불법을 저지른 현대자동차는 이해하면서 10년 넘게 불법적으로 착취당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불법으로 매도하며, 엄정한 기준과 잣대만을 들이밀려 하십니까? 그리고 현실을 말하면서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10년간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까지 이 투쟁을 하고 있는 그 처절한 모습은 외면하려 하십니까?"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차별받고 착취 받는 현실을 인정했다면 10년을 싸우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불법파견 진정도 넣지 않았을 것이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많은 사람의 고통을 가슴에 묻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기 위해, 아니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본이 세우는 줄에 우리의 몸을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당당히 그 현실을 바꾸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한 깔딱 고개 앞에 와있습니다.

그는 철탑 아래 모인 사람들에게 부탁도 했습니다.

"더이상 현실을 넘어서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난하지 말아 주세요. 3지회 의견이 다르다느니? 조합원 생각이 다양하다느니? 동력이 없다느니? 원칙만 있다느니? 이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10년간 들었습니다. 그래도 스스로가 지키고자 하는 원칙을 가지고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지 않습니까? 힘이 없으면 쉬어가기도 했지 않습니까? 역사가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현대자동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동지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입으로 물어봐 주십시오. 그리고 얻고자 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함께 투쟁해 주십시오. 그래서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해서 떠나간 동지들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제 마음에 있는 빚도 갚고, 의봉에게 짐도 주지 않게 만들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이 고공에서 다시는 동지들을 만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의 울림은 저를 많이도 부끄럽게 했습니다. 저는 나이 50이고 그는 30대 중반입니다. 나이로 치면 그보다 연배이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저보다 훨씬 컸습니다. 저는 그렇게 오랜 세월 견디지도 버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8년 넘는 세월을 버티고 견디며 여기까지 왔고 다시 철탑위에 100일 넘게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저보다 험난했으면서도 저보다 더 강하게 살고 있는 그를 만나러 다시 철탑으로 가 보아야겠습니다. 그 앞에 부끄럽지 않은 노동자로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큰 길로 걸어 철탑으로 희망버스는 5키로 넘는 도로를 걸어 철탑으로 향했습니다.
큰 길로 걸어 철탑으로희망버스는 5키로 넘는 도로를 걸어 철탑으로 향했습니다. 변창기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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