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원 정문개관 시간이라 관광객이 비교적 적었지만, 채 한 시간도 안 돼 인산인해가 되었다.
서부원
더욱 놀라운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걸작들이 타이베이의 야트막한 언덕에까지 오게 된 사연이다. 기실 소장 유물 대부분은 본디 베이징의 자금성에 있었다. 1930년대 이후 일본군이 쳐들어오면서 도난과 훼손을 우려한 당시 국민당 정부가 유물을 상자에 담아 난징을 거쳐 상하이 옮기게 된다.
1937년 일본과의 전쟁이 본토로 확대되자 다시 내륙에 있는 충칭으로, 또다시 더 안전한 운남성의 쿤밍 등지로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일본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다시 공산당과의 이른바 '국공내전'이 벌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948년 전세가 공산당에게 크게 밀리자, 당시 국민당을 이끌었던 장제스는 중대한 결정을 한다.
60여만 점에 달하는 자금성의 유물, 어떻게 건너 왔을까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륙을 떠돈 유물을 조그만 섬, 타이완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자금성에서 가져온 것의 20% 정도에 불과한 양이었으나, 당시 퇴각하는 배에 실은 것만 3천 상자, 60여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군인은 배에 못 타도, 유물은 실었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단다. 그나마 곧장 타이베이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당시 2·28 사건이 발생하는 등 어수선한 정국 탓에 진압군이 주둔했던 타이중에 우선 여장을 풀게 된다.
이후 정국이 안정된 196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의 자리에 터 잡게 되니, 다사다난했던 30여 년 뜨내기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이는 모두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비롯된 것인데다, 이동 거리도 본토를 두 번이나 가로질렀을 만큼 엄청났는데도 유물의 훼손이 거의 없었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사실 장제스에 대한 타이완 사람들의 역사적 평가가 상당히 호의적인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중화민국의 지도자이기에 앞서 대륙을 상실한 패장으로서, 또 항일전쟁 과정에서 되레 우군인 공산당군을 탄압했으며, 타이완 2·28 사건의 학살자이자 계엄령에 기댄 독재자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 '중정'을 우러르는 건 왜일까. 대개 타이완 사람들은 '국부' 쑨원과 함께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북벌을 완수한 그의 애국심과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성을 높이 친다. 오죽하면 타이베이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간선도로를 '충효로'라 이름 붙였을까. 곧, 패전은 그의 책임보다는 부패한 국민당 군인들의 몫이 크고, 그러하기에 그가 타이완으로 밀려나 가장 먼저 단행한 것이 바로 부정부패의 척결 아니냐고 외려 반문한다.
그런 그들의 인식에는 별로 동의하진 않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만약 장제스가 타이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야 한다면, 바로 문화유산의 보존에 대한 지극정성의 마음가짐 아닐는지. 그 어떤 문화재든 본디 있었던 자리로 가는 게 맞지만, 지금 고궁박물원의 유물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엄청난 전화를 과연 피할 수 있었을까.
개관 시간에 맞춰 들어갔는데, 나와 보니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음성 안내기의 도움을 받아 관람한 것을 헤아려보니 고작 200개도 안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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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만 점 자금성 유물이 타이완에 간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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