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대선기간 '국정원 정치개입' 확인이광석 서울 수서경찰서장이 18일 오후 지난해 대선기간 발생한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 수사 결과 국정원 직원과 공범인 일반인을 국가정보원법 위반(정치개입) 혐의로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권우성
경찰은 지난 4개월여 동안 국가정보원 직원 김아무개씨와 이아무개씨, 민간인 이아무개씨 등 세 명이 지난해 8월부터 12월 초까지 올린 글 400여건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여왔다. 이를 바탕으로 400여건 가운데 100여건의 글이 '국정원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국내정치 개입을 금지한 국정원법 제9조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18일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들의 행위는 선거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지난 대선과 직결되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빠지면서 '축소수사'라는 지적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광석 서울 수서경찰서장은 이날 수사결과 발표에서 일관되게 '국정원의 대선개입 혐의'만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국정원 김씨 등의 혐의는 공직선거법상 선거에 관여한 것으로 보는 '적극적 의사 표시'나 '선거운동'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며 "(이들이 올린 400여건의 글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경찰이 4개월여간 벌인 수사를 통해 내린 결론은 '이들이 국내정치에는 관여했으나 대선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인터넷 댓글 작업'이 국정원법 위반에는 해당하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 2명과 이들을 도운 민간인 1명은 지난해 8월부터 12월 초까지 400여건의 글을 올렸다. 특히 이들이 문제의 글을 올린 기간에는 ▲박근혜(새누리당)·문재인(민주통합당) 대선후보 확정(8-9월) ▲안철수 대선후보 출마 선언(9월) ▲안철수 대선후보 사퇴(11월) 등 민감한 대선일정들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게다가 이들이 올린 글은 대부분 정부와 여당(박근혜 후보)에 유리하고, 야당(문재인 후보)에 불리했다.
술 마셨는데 음주는 아니다?..."선거법 위반혐의 유효" 권 수사과장은 교체돼그런 점에서 이들의 댓글 작업이 대선과 전혀 무관하다고 경찰이 판단한 것은 '축소수사'의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날 일부 기자들도 "술을 마셨는데 음주는 아니라는 것이냐?"고 따져물었을 정도다.
경찰의 수사결과는 스스로 밝혀온 내용과도 어긋난다. 이 사건 초기 수사실무자였던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지난 1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경찰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자료를 확보하지 않고는 나오기 힘든 발언이다. 하지만 공직선거법 위반까지도 염두에 두고 수사를 벌이던 권은희 과장은 수사도중 갑자기 교체됐다(2월 4일). 경찰쪽은 "정기인사에 해당한다"고 해명했지만, 민감한 사안을 수사하고 있던 수사과장을 교체한 데는 '외풍'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게다가 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사흘 전까지만 해도 경찰은 국정원의 대선개입에 혐의를 두고 있었다. 지난 15일 안재경 경찰청 차장은 "국정원에서는 개인적 활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국정원의 조직적인 개입 여부를 종합적으로 다 수사할 것이다"라며 "댓글을 단 직원이 윗선의 지시를 받고 행동에 옮겼는지 조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국정원 중간 간부들도 조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선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국정원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다면 그것은 대선개입 의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경찰 고위간부인 안 차장의 발언이 답보상태의 경찰수사에 쏟아지는 비난 여론을 무마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사흘 뒤에 발표한 수사결과는 그의 발언을 뒤집은 것이나 다름없다.
"경찰은 국정원 직원 2명이 저지른 일로 만들어 버렸다"경찰은 '인터넷 댓글 공작'의 진원지로 의심받고 있는 심리정보국의 민아무개 국장도 조사하지 못했다. 이광석 서장은 "민 국장이 출석요구에 불응했다"며 "조사가 안된 상태라 '혐의가 있다,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석한 한 관계자는 "4월 초 서면으로 한번 부르고 이후에는 문자로도 한번 더 연락했다"며 "전화는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안했다"고 해명했다.
민 국장을 조사해야 원세훈 전 원장까지 이어지는 국정원의 조직적 개입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도 경찰에는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댓글 공작 의혹을 민주통합당에 제보했던 전직 국정원 직원은 "원세훈 원장이 지시하지 않고 민 국장이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결국 경찰수사는 원세훈 전 원장에게도 이르지 못한 셈이다.
민주통합당의 '원세훈게이트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활동중인 김현 의원은 "지난 15일 경찰청 차장이 '국정원의 조직적인 개입 흔적이 있다'며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 여지를 남겨두었는데 그런 절차를 제대로 밟지도 않은 채 사실상 경찰수사를 종결했다"며 "결국 경찰은 이번 사건을 국정원 직원 2명이 저지른 개인적인 일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했다.
김현 의원은 "공직선거법 혐의로 걸어야만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한 부분이 특정되는데 그것을 사실상 무혐의로 처리했다"며 "이는 상부의 지시에 따른 정치(대선)개입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이 대북심리전 차원에서 활동했거나 개인적으로 인터넷 활동을 벌인 것으로 축소해버린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김현 의원은 "경찰은 국정원의 비협조를 핑계로 민 국장도 소환조사하지 못하는 등 국정원에 굴복했다"며 "경찰은 외풍을 지나치게 세게 받기 때문에 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상대로 한 수사를 하기 버겹다"고 꼬집었다. 그는 "앞으로 검찰-경찰-국정원의 삼각편대의 개혁을 어떻게 이루어낼지가 남은 과제다"라고 강조했다.
사실 경찰의 축소수사 징후는 대선일 직전인 지난해 12월 16일 김용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중간수사결과 발표에서 이미 감지됐다. 당시 김 청장은 이례적인 시간대인 오후 11시에 "김씨가 특정 대선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단 흔적이 없다"고 발표했다. 박근혜-문재인 대선후보의 마지막 TV토론이 끝난 지 1시간 만이었다는 점에서, 편파적인 대선개입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대선 전 개입 흔적 확인하고도 없다고 발표했다...양심선언 나올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