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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사회 '열정 노동'을 꼬집는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등록 2013.04.28 22:00수정 2013.04.2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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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책표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책표지.웅진지식하우스

학교 선배 C는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꿨다. 졸업 후, 그는 한 영상 프로덕션에 입사했다. 계약직이었고, 정규직 전환이 분명치 않은 일자리였다. C는 임금 수준을 두고 "교통비와 담배값 빼면 남는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부러움 섞인 축하를 건넸다. 요즈음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다고 말이다. C도 주변에서도 이를 행운이라 여겼다.

C는 자신의 일에 열정을 오롯이 쏟았다. 가끔 있는 모임자리에도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다"며 참석을 매번 미뤘다. 여의도에 있는 그의 회사 근처를 지나다가 "잠깐 얼굴이나 보자"고 연락을 했다. C가 취업한 지 몇 달 만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로 나타난 그는 "일이 밀려서 며칠을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며 "곧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C가 속한 팀은 종합편성채널에 매주 한 차례씩 방영되는 다큐멘터리를 '납품'했다. 일주일을 정신없이 뛰어야만 기한을 맞출 수 있었고, 그를 포함한 팀원들은 말 그대로 회사에서 살아야만 했다. 한 회 제작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회 제작이 이어졌다. '다큐멘터리를 꿈꾸던' 청년들은 쳇바퀴를 돌리는 부품이 됐다. 담배 한 개비씩만을 나눠 피우고, 쫓기듯 금세 돌아서는 C의 충고가 귀를 때렸다.

"이직을 준비하고 있어. 팀원 대부분도 그래. 지금처럼 살면 미래가 안 보여. 먹고 살기도 힘들겠더라. 너 일자리 구할 때, 고민 많이 해봐라. 꿈이 전부는 아냐."

우리를 지배하는 '열정 노동'의 사회적 명령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은 물론이고 10평 남짓의 네일아트 숍에서 일하는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열정 노동'의 명령은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열정'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그리고 '열정'을 요청하는 사회적 명령 속에서,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끌어내고 있는지,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책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여는 말 중)

책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열정'이라는 미명아래에서 꿈과 노동을 착취하는 우리사회 '열정 노동'의 현실을 보여주는 책이다. 시나리오 작가·프로게이머·IT·연예인·미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사례는 열정을 빌미로 한 열악한 노동환경이 이미 구조적이라는 것을 알린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12년 8월 기준으로 47.5%에 달한다. 지난 3월, 통계청의 청년 고용률도 38.7%로 29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취업에 대한 불안정함이 온 사회를 집어삼키는 중이다. 노동환경과 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혹은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 더 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C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책은 이러한 불안정함을 무기로, 우리사회가 사람들에게 '열정 노동'의 논리를 강요한다고 꼬집는다.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일자리를 구한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노동환경이 열악하더라도 꿈을 위해 헌신하라' '구직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라' 따위의 사회적 명령이 삶을 짓누른다. 모든 반론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혹은 "남들은 취업도 못하고 있는데"라는 말을 이겨내지 못한다.

지난 1월, 유명 프랜차이즈 헤어숍의 대표가 종업원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언론은 '도제' 형식으로 채용이 이뤄지는 미용업계의 특성이 그 원인이라고 앞다퉈 지적했다. '을'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윗사람에게 저항조차 못하는 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2월에는 청년세대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이 "미용보조의 평균 시급은 2971원,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64.9시간"이라며 업계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미용업계의 사례는 한 단면일 뿐이다. 기업과 구직자의 관계가 '슈퍼 갑'과 '을'인 이상, 열정을 강요당하는 노동자에 대한 온갖 착취는 그저 손쉬울 따름이다.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우리

"'노동자'라는 단어는 일종의 불명예가 되었다. 이 사회의 노동자 수는 결코 줄지 않았지만. 자신이 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노동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역설적으로 해고당한 후 투쟁하는 일군의 사람들만이 스스로 '노동자'라고 선언한다. 그들과 다르게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잊어야 한다."(본문 51쪽)

책은 '열정 노동'의 밑바탕에 '노동자'와 '시민'의 분리가 있다고 파악한다. 민주화라는 목표로 뭉쳤던 노동자와 시민이 이른바 '87년 체제'를 계기로 나뉘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노동자를 소외시켜 '열정 노동'이 용이해졌다는 분석이다. IMF 사태를 기점으로 퍼진, 신자유주의의 바람도 이를 부채질했다. '노동의 유연성'이 강조되면서 특수고용직·촉탁계약직 등으로 불리게 된 노동자가 늘었다. 이들은 분명히 노동자이지만, 자신을 노동자로 부르기를 거부하거나 부를 수 없게 됐다.

결국 노동자가 아닌 선택지로, 우리는 전문가와 사장을 꿈꾼다. 이를테면 몇몇 기업에서는 모든 사원을 '프로'나 '아티스트'로 부른다. 개개인의 전문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런 호칭이 오고가는 와중에 노동자가 스스로를 노동자라 인식하기 쉬울까. 책에서도 영화나 문학 등 문화산업 전반에서 '창조자'가 되기 위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내해야만 하는 청년들을 비춘다.

한편으로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창업 열풍이 불어 닥쳤다. 대학마다 창업동아리가 없는 곳이 드물고, 정부에서도 IT산업을 중심으로 창업을 적극 권장한다. 기업도 빠지지 않는다. '창업경진 대회' 등을 중요한 '스펙'으로 치면서 대학생의 등을 떠민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코스닥 협회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코스닥 상장기업 중 20~30대 최고경영자(CEO) 비율은 3.6%에 그친다. 2002년에는 12.6%였다. 경제구조가 창업으로 성공하기 어려워졌고 실패했을 때의 위험성도 높아졌지만,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드물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것은 각종 '고시'에 매달리는 일이다. 사법고시 등 전통적인 고시는 물론이거니와 공무원고시부터 교원임용고시·언론고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취업시험은 고시가 돼버렸다. 책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공무원·교사·언론인이 된 이들 중 많은 이가, 노동자가 아니라고 여겼기에 그 길을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노동자라는 인식이 사그라질수록, 자연스레 노동자가 얻을 수 있는 권리도 줄어든다. 책은 '열정 노동'이 그 틈바구니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며 경고한다.

이제는 덧없는 위안을 버리고, 현실을 자각할 때

"경영 담론은 예전에도 많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삶을 '관리'하고 '계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경영'과 '삶', 혹은 '노동'과 '삶'은 하나가 되었다. 스펙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뻔한 내용인 줄 알면서도 자기 계발 도서를 읽으며 동기를 부여받는다."(본문 104쪽)

삶이 팍팍해지자, 사람들은 위안을 주는 대상을 찾아 헤맸다. 사람들에게 동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자기 계발 도서가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온갖 영화·드라마·예능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대상에는 '힐링'이라는 단어를 붙이며 열광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안은 근본적인 해결을 불러올 수 없다. 책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덧없는 위안이 아니라, '열정 노동'이 우리가 노동자이기 때문에 이뤄지는 것임을 자각하라고 말한다.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불만의 폭발이 좀 더 진보적인 사회 구성의 욕망으로 전화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태를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가 불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세상을 맞이하는 중이다. 옛 속담을 비관적으로 비틀자면, 호랑이에게 물려 갈 때 정신을 차린다고 산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두 번의 기회는 더 주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본문 252쪽)

책이 꼬집는 '열정 노동'의 사례에는 시민단체와 진보정당의 상근자도 있다. 그들 역시 열정의 이름아래에서 저임금과 긴 노동시간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노동에 가장 예민할지 모르는 집단에서조차, 노동에 대한 인식이 어긋났다는 것은 충분히 상징적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자'로서의 자각이라는 방증임으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읽는다면 언론에서 비춰지는 노동쟁의, 후배가 아르바이트에서 겪는 저임금 문제, 취업한 친구가 걱정하는 노동의 불안정성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노동자 혹은 예비 노동자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노동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다. 그 지점에서 '열정 노동'을 위해 우리가 열정을 쏟아야만 할 대상들이 분명해진다.
덧붙이는 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11년 4월, 1만3천5백 원.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1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열정 노동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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