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음반(부산근대역사관 전시품)
부산근대역사관
유행가는 레코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황성신문> 1899년 3월 13일자 보도를 보면 한국에 유성기가 처음 상륙한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1926년경까지 축음기와 레코드는 부유층의 재산 목록에나 속하는 아주 고가의 귀중품이었다.
따라서 축음기와 레코드에 실려 대중들에게 전파된 최초의 노래는 아직 유행가가 아니었다. 판소리, 잡가 등이 먼저 레코드에 실려 공중을 탔다. 1913년 당시 레코드는 '소리판'으로 불렸고, '소리 넣는 사람'은 당대 명창들인 송만갑, 박춘재, 정정렬, 김창룡, 김창환, 김연옥, 조목단 등이었다.
이 축음기와 레코드가 한국 땅에서 상품 가치를 인식시킨 것은 '가요사상 최초의 인기곡'으로 기록된 윤심덕의 <사의 찬미>였다. 이 노래의 성공을 본 일본의 레코드 자본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유행가 사업이 성공할 것을 간파, 앞다투어 한국 땅에 상륙했다.
식민지 수탈 목적으로 시작된 유행가 산업본격적으로 한국에서 레코드 산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빅터 레코드와 콜롬비아 레코드사였다. 1927년과 1928년에 각각 유행가 사업을 개시한 두 회사는 모두 일본 땅에 본점을 둔 일본인 회사였다. 우리나라의 유행가 산업은 처음부터 식민지 지배의 경제 수탈 과정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의 찬미>의 성공은 레코드의 존재가 뒷받침해준 응원의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 노래에 얽힌 정사 사건에 힘입은 결과이기도 했다. 노래를 부른 윤심덕은 일본에서 귀국하는 길에 유부남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정사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한국 대중들에게 크나큰 흥미를 던져주었고, 가수 윤심덕이 1926년 8월 3일 죽은 이후에야 한국땅에 들어온 <사의 찬미>는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다.
광막한 황야에 달니는 인생아너의 가는 곳 그 어디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나 죽으면 고만일까행복 찾는 인생들아너 찾는 것 서룸 죽음을 예고하는 듯 느껴지는 <사의 찬미> 가사는 누가 썼을까. <한국가요사>에서 박찬호는 '가사는 윤심덕 자신이 붙였다고 한다'고 기술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의 선성원도 노랫말이 윤심덕의 '자작시'로 보고 있다. 하지만 <노래1>에 논문을 발표한 이영미는 '작사자는 알 수 없다'고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사의 찬미>의 작사자는 누구일까?
윤심덕은 1926년 일본 오사카 닛토레코드에서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음반을 취입했다. 그런데 본래 <사의 찬미>는 음반 취입이 예정되어 있던 노래가 아니었다. 갑자기 윤심덕이 음반에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 물결>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노래를 넣자고 강력히 요청했다는 것이다. 본래의 리듬은 구슬픈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느리게 변형되었다고 한다.
<사의 찬미> 성공 이후 서울에 지사를 차린 빅터레코드가 제일 먼저 발매한 노래는 1927년에 나온 전수린 작곡, 왕평 작사, 이애리수 노래의 <황성 옛터>였다. 유행가들은 때마침 같은 해 2월 16일부터 전파를 내보내기 시작한 경성라디오방송을 타고 널리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경성방송국이 개국할 당시 한일 양국어의 혼합 방송이었다는 사실과, 나라 안에 라디오가 1440대 밖에 없었으며, 1932년 말에도 2만565대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행가의 폭발적 확산은 역시 음반에 힘입은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