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주말농장 고라니, 입 맛은 '강남스타일'

수줍게 미소 짓는 감자 꽃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사연은?

등록 2013.06.03 18:09수정 2013.06.0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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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채꽃이 아닌가 합니다.
유채꽃이 아닌가 합니다. 추광규

초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정래 선생은 보릿고개를 막 지난 이 무렵 해방 직후 농촌 모습을 <태백산맥>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의 반찬거리가 넉넉해지느냐 아니냐는 텃밭농사를 얼마나 알뜰살뜰하게 짓는가에 달려 있었다. 바깥 농사를 남자가 채를 잡는 농사라면 텃밭농사는 순전히 여자가 책임지는 농사였다.

넓을 수 없는 텃밭에 농사를 지어 두 철에 걸친 반찬거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은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가야 하는 농촌 아낙네의 부지런함과 슬기로움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이하 생략) 

텃밭을 한 골이나마 차지할 수 있는 씨앗들은 불문율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잎이나 열매를 뜯어내고 따내도 계속 새 잎과 새 열매를 피워내고 매달아야 하며, 가을에 이르러서는 내년의 씨앗을 영글게 할 수 있어야 했다."

60여 년 전 가난한 소작 농가에게 텃밭이 얼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잘 묘사한 대목입니다. 텃밭의 작물은 뜯어내고 따내도 계속해서 먹을거리를 내놓아야 한다는 점과 아낙네의 부지런함을 텃밭 농사의 특징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즘 텃밭은 어떻게 가꾸어 지고 있을까요? 아니 더 정확하게 도심 텃밭은 소설 속 60년 전 묘사와 얼마만큼 차이가 있을까요?

 도시농부들이 분양 받은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도시농부들이 분양 받은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추광규

수줍게 피어난 감자꽃... 알고 보니 게으른 농사꾼?


지난 2일 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찾아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있는 도심주말농장. 2000여 개 소에 이르는 5평 남짓의 텃밭을 도시민들이 가꾸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원래 병원 부지였는데, 안산시에서 주말농장으로 만든 후 시민들에게 무료로 분양했습니다.

작년에는 저희 가족도 분양을 받아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는 절차를 착각해 자격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찾지 않다가 다른 분들이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궁금해 이날 발걸음을 했습니다. 주말농장을 둘러보는데, 한 텃밭에서 감자 꽃이 꽃대를 피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보기엔 좋은데 그 내막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감자 꽃 입니다.
감자 꽃 입니다. 추광규

텃밭 바로 옆에 있는 오두막에 앉아서 쉬고 있던 안산시 관계자에게 감자를 언제쯤 수확하느냐고 물어보니, 제가 그 텃밭을 가꾸고 있는 줄 알고는 "이달 말에는 수확해야 한다"면서 "꽃대를 꺾어 주라"고 조언했습니다.

꽃대를 꺾어 줘야 하는 이유는 그 영양분이 뿌리로 내려가야 감자가 더 실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조언을 들으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저 텃밭을 가꾸는 분은 무척이나 게으른 농부(?)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자 농사가 무척이나 잘 된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자 농사가 무척이나 잘 된 것 같습니다. 추광규

감자는 3월 말경, 씨감자를 잘라서 심어 놓으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쑥쑥 자랍니다. 이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농사가 잘된 것 같지만, 막상 그 수확은 신통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달 말에 감자를 캐낸 텃밭은 8월 말이 돼야 가을 김장용 배추를 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조정래 선생이 <태백산맥>에서 묘사한 것처럼 '잎이나 열매를 뜯어내고 따내도 계속 새 잎과 새 열매를 피워내고 매달아야 하며, 가을에 이르러서는 내년의 씨앗을 영글게 할 수 있어야...'한다는 조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텃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타리 세워 놓은 그 이유가 뭔가 했더니...

감자꽃에서 눈을 뗀 후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주말농장 서쪽에 산자락 옆에 붙어 있는 텃밭 모습이 낯설었습니다. 누가 이런 곳에서 농산물을 훔쳐간다고, 울타리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줄로 촘촘히 엮어서 막아 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줄로 촘촘하게 세워 외부의 침입을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줄로 촘촘하게 세워 외부의 침입을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추광규

하지만 이렇게 울타리를 쳐 놓은 이유를 들어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생 고라니가 산에서 내려와 농사를 망치기에 그걸 막기 위해 울타리를 세웠다는 겁니다. 

더구나 이곳을 허락도 없이 방문하는 고라니의 입맛은 '강남스타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놈(?)은 상추와 같은 값싼 채소는 거들떠 보지 않고 '치커리' 등 값비싼 채소를, 그것도 어린 모종만 골라서 뜯어 먹는답니다. 그들의 한탄을 듣고 있으려니 저 또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심어 놓기만 하면 고라니가 계속해서 뜯어 먹는 바람에 반복해서 모종을 심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모종 값으로만 6만 원이 넘게 들어갔다는 대목에서는 야생동물 때문에 고통 받는 농민들의 그 심경이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텃밭의 주인이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울타리를 쳐놓은 다음부터는 고라니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라니의 발자국 입니다.
고라니의 발자국 입니다. 추광규

문제는 이제 고라니가 울타리를 친 텃밭이 아닌 그 옆 텃밭을 침범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텃밭을 살펴보니 발자국이 선명한 게 불과 며칠 전에 방문한 게 확실해 보입니다.

 고라니의 발자국이 선명한 가운데 모종을 계속해서 뜯어 먹으니 상추씨를 뿌려 놓았더군요.
고라니의 발자국이 선명한 가운데 모종을 계속해서 뜯어 먹으니 상추씨를 뿌려 놓았더군요. 추광규

산은 수십 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깊지도 않고 길 하나만 건너면 수 천 세대가 살고 있는 대단지 아파트가 있는데도 그 옆에 야생 고라니가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여기에 더해 초여름으로 들어서면서 사방에 자라고 있는 풀을 뜯어 먹지 않고 굳이 이곳에서 치커리와 같은 비싼 채소류의 모종만 뜯어 먹는다는 고라니를 상상해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고라니는 무척이나 겁이 많은 야생동물입니다. 그 같은 본능에도 맛난 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이 가꾸고 있는 치커리 어린 싹을 뜯어 먹는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미소가 다시 한 번 떠올랐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감자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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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차는 굴러가는게 아니라 뛰어서 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화물칸도 없을 수 있습니다. <신문고 뉴스> 편집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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