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광주시민 앞에 죄인"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

등록 2013.06.09 22:05수정 2013.06.0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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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북한군 개입설을 제기한 분들을 고소한 5·18 왜곡대책위는 북한이 5·18사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한 증거로 증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5·18이 완벽한 비폭력 평화 시위 민주화운동이었다는 것도 증명해야 합니다" - 정미홍(@Naya2816)

"에일리언이 아니라는 증거를 그녀가 제시하지 않는 한 그냥 인간사에 관심 많은 파충류 외계인으로 간주하면 됩니다" - 진중권(@unheim)


5·18역사왜곡대책위원회가 5·18민중항쟁을 왜곡·폄훼한 이들을 고소하자 정미홍 더코칭그룹 대표와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지난 5일 입싸움을 트위터를 통해 했다. 두 사람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5·18민중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북한군개입설' 그리고 학살당한 사진을 조롱한 극우성향 <일간베스트> 누리꾼들 때문에 엄청난 파문에 휩싸였다.

5·18민중항쟁 왜곡과 폄훼하는 이들, 법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빛고을과 희생자 가족들 그리고 상식있는 수많은 이들은 전두환 일당이 33년 전 자행한 '학살 트라우마'를 경험하면서 가슴을 쳤고, 울었다. 생각이 있다면 5·18민중항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거룩한 저항임을 안다. 그리고 전두환이 학살자임을 안다. 그런데도 북한군 개입설을 펴 전두환을 학살자에서 교묘히 탈출시키는 시도를 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한 <채널A>는 "증언자가 광주에 내려오지 않았다는 근거를 대"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북한군개입설을 "확인할 수 없다"고한 국방부 별 다르지 않았다. "확인할 수 없다"와 "사실이 아니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다르다. 그러니 아직도 상식없는 자들이 북한군개입설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면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감정'이 아닌 '법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한다.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한울
5·18민중항쟁을 폄훼하는 이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있다. 5·18민중항쟁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1980년 5월 빛고을 거룩한 항쟁은 학살자 전두환 일당의 대규모 진압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패배는 또 다른 승리를 향한 시작이었다.


"광주항쟁에서는 당시의 패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장기간 저항투쟁을 통해서 권력에 의해 묻히고 왜곡되었던 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법에 의해 책임자를 처벌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실시되었고 기념사업까지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1980년 5월에 죽었던 항쟁이 장기간의 저항운동을 통해 부활했음을 의미한다."<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 12쪽

80년에 죽었던 항쟁 오랜 저항으로 부활


5·18민중항쟁을 폄훼하는 이들은 '~카더라식' 주장을 했다. 광주연구소 이사장인 나간채가 쓴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한울)는 "광주항쟁 발발의 역사적 배경이 된 부마항쟁과 서울의 봄에서부터 시민의 힘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이룩했던 해방 광주의 자치공동체, 공수부대의 투입으로 좌절된 광주항쟁, 그리고 패배했던 항쟁을 부활시키고 오월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끊임없이 계속된 5월운동까지 치열했던 광주항쟁의 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5·18민중항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역사인식' 이전에, 상식이란 눈으로 책갈피 한 한 장을 넘겨보시라. 그럼 5·18은 '폭동'도, '북한군개입'도 사실이 아니며, 전두환이 어떤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지 알 수 있다. 

5·18민중항쟁은 나라밖에서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80년대 아시아는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저항이 봇물을 이루었다. 1980년 필리핀 인민항쟁, 1988년 버마 민주항쟁, 1989년 중국 톈안먼 항쟁과 1980년 광주항쟁이다. 알듯이 모두다 권력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패배했다.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 교과서인 한국 민주주의"... '광주항쟁'

하지만 유일하게 광주만 오랜 저항 끝이 승리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아시아인권위원회 바실 페르난도는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의 교과서"라고 칭송했다고 나간채는 말한다. 1980년 빛고을이 없었고, 패배 후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굴복했다면 한국 민주주의가 아시아 민주주의 교과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광주항쟁이 비록 그 때는 패배했지만, 오래 시간 동안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중심에는 '시민'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현대 한국의 사회운동사에서 매우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 항쟁은 사회운동의 폭과 깊이, 규모와 강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 시민의 총체적 참여, 고도로 통일된 절대공동체 실현, 무장 시민군 형성, 중무장 정규군을 퇴각시킨 민중의 거대한 힘, 죽음이 뻔한 최후의 극한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을 선택한 희생정신 등이 그것이다.(32쪽)

70여만 명 광주시민 중 20만~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는 어린아이와 노약자 등 활동이 어려웠던 이들을 빼고는 광주시민 모두가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빛고을이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빛고을은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는 물론 사적인 것이나 개인적 소유개념이 소멸되었고 너와 나, 너의 것과 나의 것이라는 구별이 사라진 사회"였다고 나간채는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거룩한 공동체를 학살자 전두환 일당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하느님도 떠나가버린 광주"...굳게 뭉쳐 손잡고 일어서다

이웃사랑과 대동세상이 잔혹한 살상에 무너지자 김준태는 6월 2일자 <전남매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광주여 무등산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하느님도 떠나가버릴 정도로 빛고을을 참혹했다. 빛고을 하늘 아래에서 숨 쉬고 있던 '살아남은 자'들은 27일 새벽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떠오를 때 도청에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을 잊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나 먼저 죽어간 열사들의 그림자에 휩싸였고 그 영혼의 부름 앞에 죄책감으로 전율했고, 그들의 장렬한 희생과 그에 대한 부채의식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결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다."

2013년을 살아가는 이들이 1980년 5월을 결코 폄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5.18민중항쟁은 1980년 5월 27일 끝난 과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반추하고 되새기면서 그들의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정신을 되살리고 후손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감히 '폭동'이니, '북한군이 개입했다느니', 학살자를 '전땅크'라고 추앙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은 상식에 어긋난 일이며,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광주시민 앞에 죄인"

무엇보다 그 때 광주참극에 침묵하지 않았던가. 정론직필을 해야 할 언론이 광주시민을 '폭도'로 내몰고, 학살자 전두환 일당을 찬양했다. 침묵한 자, 전두환을 찬양한 자 모두는 그들 앞에 죄인이다.

"1980년 5월 27일 이후 광주시민들이 광기에 사로잡힌 공수부대의 총검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살육당한 참극에 대해 지식인들은 대체로 침묵했었다. 그리하여 이 작은 산하에서 바로 이웃이 당하고 있던 그 처절한 비극을 모른 체하고 지나쳤던 마음의 빚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광주는 이들에게 민주화를 향한 마음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아픈 멍에로 지워졌다. '우리 모두는 광주시민 앞에 죄인'이라 썼던 연세대 어느 교수의 고백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191쪽)

죄인 된 마음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광주를 되살리기 위해 힘썼다. 학살자 전두환을 재판에 세우기까지 17년이 걸렸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재판에 세운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근래에 유례가 없는 세기적 재판"이었다.

17년 만에 폭도는 '민주시민'으로, 학살자들은 '군사반란자'로 위치가 뒤바뀌었다. 아니 17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제자리를 찾기 위해 살아남은 자들이 기나긴 싸움, 고난에 찬 싸움을 한 결과였다. 이 "싸움의 길은 피해자들이 겪어왔던 수난에서 이미 보았듯이, 그리고 영혼을 바쳐 이 싸움에 임했던 5월열사의 대열에서 보았듯이 피와 눈물에 젖어 오늘 여기에 이르렀"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전두환은 29만 1000원밖에 없으면에서도 호화생활을 하고, 수 십억 원짜리 경호를 받고 있다. 추징근 1600여억 원을 아직도 내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단 한 번도 "죄가 죄인입니다"라고 사죄한 적이 없다. 그리고 광주를 다시 모독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빛고을이 아직도 슬퍼하는 이유다.

전두환, 누온 체아를 조금이라도 닮아라

전두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민을 학살한 캄보디아 누온 체아가 피해자 앞에서 사과한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누온 체아는 1975~79년 크메르루주가 국민개조 등을 명분으로 200여만명을 학살한 '킬링필드' 당시 폴 포트에 이에 2인자였다.

누온 체아는 그 동안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국익을 위해 열심히 일했을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 그가 지난달 30일 재판장에서 1970년대에 부모를 잃은 피해자를 향해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당시 민주캄푸치아(크메르루주)의 일원으로서 지도자로서 책임을 피하려고 하지 않겠다. 가족을 잃은 당신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8일<한겨레>킬링필드…그러나 누가 누구를 단죄하랴 참고

200만명을 학살한 누온 체아 사과에 또 다른 학살자 전두환은 배울게 없는가. 누온 체아는 200만명을 학살했지만 나는 200명도 안 된다고 강변할 것인가? 하지만 알아야 한다. 200만명이든, 1명이든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시민을 죽이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곡된 신념으로 광주항쟁을 모독하는 이들, 광주항쟁에 빚진 자라고 생각하는 이들, 학살자 주범이면서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 전두환에게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 나간채 지음 ㅣ 한울아카데미 펴냄 ㅣ 17000원

광주항쟁 부활의 역사 만들기 - 끝나지 않은 5월운동

나간채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 2013


#5.18민중항쟁 #전두환 #빛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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