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여자-임경선
권순지
그녀의 산문집을 두 번째 만났다. <나라는 여자>는 이전의 산문집에서 내비쳤던 그녀를 그대로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좋았다. 글로 확인되는 그녀의 일관된 태도에서 즐겨가는 단골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간 듯, 편안하면서 또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미용실에 간다는 건, 그간 고수해왔던 헤어스타일에서 이탈하여 새롭게 변신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설레임이 있다. 그런데 그 미용실이란 설레는 단어 앞에 '단골'이란 수식을 덧붙여주면 편안함이 섞인다. 나에게 꼭 맞는 머리를 해줄 수 있는 전문가가 그곳에 있다는 안도와 편안함.
그녀의 산문집을 또 한번 읽어 내려가면서, 그녀가 단골 미용실만큼이나 설레며 편안한 주제의 글을 주로 쓴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나'를 통찰할 수 있게 만드는 편안함과 그 통찰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느껴지는 설렘. 그녀 글의 매력인 것이다.
'나'를 마주하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통속적인 주제이다. 한편으론, '나'에 대해서 늘상 고민하는 현대인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한 주제로도 느껴졌다. 그렇다고 자서전이나 자기계발 느낌의 요소는 없어서 세련되기까지 해보인다. 충분히 그녀다운 느낌의 자기고백 산문집인 것이다.
'자뻑'과 '자학'쉴새 없이 읽어내려가다보니,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가 보였다. 작가, 그녀 말대로 '자뻑'과 '자학'이 항상 공존하는 존재의 보편적 사람들, 그 속엔 나도 있다. 살아가는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와 마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뻑'과 '자학'이 반복되며 진행되는 인생의 달콤쌉싸름한 맛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자뻑' 혹은 '자학'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스스로 그것들을 경험했노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충분히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편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나의 경우엔 이랬다. '자뻑'의 시기엔 내가 스스로를 인정했으니, 그럼 또 누군가에게도 인정받고 싶어지는 심리가 연달아 작용했지만, '자학'의 시기엔 그 반대로 내가 나에 대해 실망하고 그런 나를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남들은 날 위로해줬으면 하는 자기연민이 늘 따라왔다. 그녀가 책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가장 위험한 '자기연민'에 빠져들게 되는, 정말 추잡하고 시시해져버린 나를 마주하게 되는 '자학'의 시기가 내게도 제일 위험한 시기였다.
다행하게도 여기에 '자기연민'을 벗어나는 길엔 자발적 성실함이 원료로 작용한다는 것에 대한 경험적 공감이 더해지니, 어쨌든 끊임없이 자뻑과 자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를 완성해 나간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그녀 덕분에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는 보이지 않았다. 자발적 성실함이라니! 자존감이 높아진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수식들 중, 꽤 매력적인 수식을 하나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나라는 여자'에게 꼭 있었으면 하는 수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