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국정조사, 박 대통령도 조사해야 한다

작은 일도 직접 챙기는 '깨알 리더십'... 정확한 해명 없으면 정통성 의심

등록 2013.06.27 18:54수정 2013.06.27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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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친람(萬機親覽)'이라는 단어가 있다. 본래 '임금이 온갖 정사(政事)를 친히 보살핀다'는 뜻이었지만, 요즘은 아주 세밀한 것까지 시시콜콜 직접 챙기고 지시하는 리더십을 두고 하는 말로 확장되었다. 이 단어가 올해 언론에 자주 등장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권한을 아래로 위임하지 않았다.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자신이 결정하고, 그 결정과 지시를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했다. 언론은 박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관까지 직접 선택했고, 심지어 비서관 밑에서 일하는 행정관 인사까지 개입했다고 보도했다. 그로 인해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고 눈치 보기에 급급하지 할 말을 하는 참모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언론은 박 대통령에게 '깨알 리더십'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대통령의 지시나 허락 없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공개했다. 남재준 원장이 혼자 결정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국정원장은 해임감이요, 조순형 전 의원 말처럼 "박근혜 정부는 정부도 아니다." 그러나 해임은커녕 질책 받았다는 보도도 없다. 소소한 것까지 시시콜콜 직접 챙기는 박근혜 대통령이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일은 챙기지 않았고 또 지금 그냥 넘어가고 있을까?

김용판이 사라졌다

a  22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개최된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한 시민이 '원세훈' '김용판'의 구속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22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개최된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한 시민이 '원세훈' '김용판'의 구속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 최윤석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이후 언론과 정치권, 인터넷이 뜨겁다. 지난해 대선기간 내내 선거에 이용했던 'NLL 포기' 발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NLL을 유지하면서 이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로 발전시키려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새누리당의 대화록 왜곡·뻥튀기가 드러나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슬그머니 김용판이 사라졌다. 정상회담 회의록, NLL로 논란의 중심이 옮겨가고, 국정원 선거개입은 계속 논란이 되지만 슬그머니 김용판 전 서울 경찰청장이 사라졌다. 혹시 박근혜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것은 김용판을 관심권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박근혜 정부가 진정으로 보호하고 싶은 사람은 김용판이 아닐까? 아니 정확히는 김용판의 뒤에 숨겨진 사람들을 숨기려는 게 아닐까?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 말은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그의 철학 체계에서 쓴 말이지만,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이 그가 사용하는 언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국정원 사건이야말로 그렇다. 어떤 언어로 표현하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본질은 완전히 달라진다.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서에는 국정조사의 명칭이 '국정원 직원 댓글관련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로 되어 있다. 이 사안이 과연 국정원 직원 댓글 관련 의혹에 불과한가? 민주당은 '국기문란 국정원 사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뿐인가?


신경민 민주당 국정원 선거개입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이 사건을 4단계로 나눈다. 사건이 하도 복잡하고 연관된 기관이 많아서 단계를 나눠 나열하고 하나씩 꼼꼼히 따져 사안의 본질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4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 지난해 12월 11일 역삼동 오피스텔 사건 관련
2단계 : 위 사건 발생부터 12월 16일 경찰의 허위수사 발표까지의 사태
3단계 : 올해 6월 14일 검찰의 기소까지의 검찰과 법무부의 대립과 청와대 개입
4단계 : 최근 국정원의 NLL 관련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통한 물 타기 시도

그런데 신경민 의원은 이 사건의 본질은 다름 아닌 2단계에 있다는 점은 빠트리고 있다.

12·16, 지난 대선 결과를 결정했다

대선을 불과 3일 남겨둔 12월 16일 저녁 마지막 TV토론이 열렸다. 여론조사가 박빙으로 변해서인지 박근혜 후보는 초반부터 공세적으로 나왔다. 민주당이 28살 미혼 여성을 2박 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했다면서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고 선거를 혼탁하게 만든 책임을 져야 한다며 문재인 후보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정희 후보가 빠져 처음으로 (또 마지막으로) 양자토론이 된 그날 TV토론은 누가 봐도 문재인 후보의 완승이었다.

그러자 TV토론이 끝난 지 불과 1시간 후 서울경찰청은 국정원 여직원의 컴퓨터에서 문재인 후보 비방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발표를 했고, 다음날 조·중·동을 비롯한 신문들은 이를 1면 톱으로 실었다. 물론 이 발표는 검찰이 공소장에서 밝힌 것처럼 전적으로 조작된 허위 수사발표였다.

역사에서 만일은 없다지만, 만일 조작된 허위 수사결과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더라면 3일 후 실시된 대통령선거 결과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만일 원세훈 공소장처럼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4개 사이버팀 70여명의 직원들이 원세훈 원장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인터넷에서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찬양 내지 반대·비방의 글을 유포하여 국정원의 정치관여 범죄행위를 하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낙선 목적의 선거운동을 했다"는 진실이 발표되었더라면 대선결과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박근혜 후보는 국정원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12월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28살 미혼 여성의 인권을 강조하며 "이번 사건이 저를 흠집 내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민주당의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밝혀진다면 문재인 후보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공격했고, 16일 TV토론에서도 이를 반복·강화했다. 그랬는데, 박근혜 후보의 주장이 틀렸다고 발표되었다면 대통령선거 결과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분명히 대통령선거 결과는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국정원의 정보정치를 용납할 만한 국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2월 16일 TV토론에서의 공세와 이어진 허위수사 발표는 대선결과를 뒤집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16 쿠데타'와 '12·12 쿠데타'가 군부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졌듯이 지난해 '12·16 허위 수사발표' 역시 권력 장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김용판 기획·각본·감독, 박근혜 주연?

'12·16'는 어떻게 이뤄졌나? 현재로서는 그 실체의 일부라도 알려주는 것이 김용판 공소장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김용판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12월 15일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허위수사결과를 발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문제의 12월 16일 오전에 수서경찰서장에게 중간수사결과 발표 준비를 지시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자신의 집무실에서 관련자들과 함께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위한 회의를 했고, (그 시간 3차 TV토론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날 밤 11시 보도자료 배포와 다음날 9시 언론 브리핑을 결정하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수사를 방해했다.

공소장에 나오는 김용판은 거의 신(神)적인 존재다. 지난 대선 결과를 뒤바꾼 '12·16'을 홀로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썼고, 일사분란하게 진행되도록 감독하고 통제했다.

그런데 김용판이 기획·각본·감독한 국정원 사건 허위 수사결과 발표의 주연은 다름 아닌 박근혜 후보였다. 박근혜 후보는 12월 14일 기자회견에서 허위 수사결과 내용대로 주장했다. 16일 TV토론에서도 토론 1시간 후에 발표될 허위 수사결과 내용대로 주장하며 문재인 후보를 공격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서울경찰청장의 수사조작과 허위발표를 대통령후보가 미리 알고 그에 맞춰 기자회견을 하고, TV토론을 할 수 있었을까? 박근혜 후보와 김용판이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상식적인 추론은 공소장에는 김용판이 주도한 것으로 나오는 허위 수사결과 발표가 사실은 박근혜 캠프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추론한다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 권영세, 김무성 등 여러 정황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핵심은 박근혜 후보가 대선 기간 중 행한 국정원 사건에 대한 주장이 허위사실인 것을 인지하고 주장했는지 여부다. 그 점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이 아주 세밀한 것까지 시시콜콜 직접 챙기고 지시하는 '만기친람 깨알리더십'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정조사, 박근혜 대통령도 조사해야 

a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 청와대


여야가 국정조사를 합의한 후, 그 범위와 초점·증인채택 여부를 두고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새누리당이 더 공세적이다. 여직원 감금사태, 인권유린, 제보자 매관매직 의혹을 조사하고 문재인 의원과 김부겸 전 의원도 증인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민주당은 권영세 주중 대사도 증인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김무성 의원, 나아가 박 대통령까지 증인으로 채택해야 한다. 출석이 어렵다면 서면으로라도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 사안에 대해 정확한 해명이 없다면 정부의 정통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실히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이 문제를 두고 미적대고 있다. 왜 그럴까?

사실 지금의 민주당 지도부는 대선 패배 이후 문재인 책임론, 친노 책임론, 잘못된 선거운동 책임론을 제기하여 당권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제기한 책임론 중 하나가 국정원 여직원 사건에 대한 과잉 대처가 대선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 와서 지난 대선 패배가 잘못된 선거운동 때문이 아니라 허위 수사결과 발표 때문이었고, 그것을 박근혜 캠프가 주도했다고 강하게 공격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 동안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민주당 의원들은 이 문제가 자칫 국민들에게 대선불복으로 비춰질까봐 노심초사한다. 바로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민주당은 진실의 문 앞에서 미적대고 있다. 그것은 검찰이 원세훈과 김용판만 불구속 기소하고 국정원과 경찰 직원들 그리고 새누리당에 대해서는 무더기 불기소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 진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길이요, 국민들이 바라는 길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새시대전략연구소 소장입니다.
#국정원 #국정조사 #박근혜 #김무성 #김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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