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자락에 위치한 공동 텃밭에서 일한 뒤 쉬고 있는 서울 시티 파머스 회원들
서울시티파머스
그렇게 방치되었던 공터가 지금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구획을 나누어 갖가지 채소를 심고 통나무를 박아 예쁘장한 통행로까지 만들었다. 시금치, 상추 등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푸성귀는 물론, 오크라(okra), 카르둔(cardoon) 등 물 건너온 채소까지 수십 종류가 옹기종기 자라고 있었다.
한쪽에는 당귀 같은 약초만 따로 심은 곳도 있었다. 마치 온 세상 채소의 자연 박물관을 보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그토록 다양한 종류의 토마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외국 채소들은 해외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이날 텃밭 가꾸기에 모인 사람들은 열댓 명 가까이 되었다. 대부분 저스틴 또래의 20, 30대 젊은이들이다. 갈색 머리에 하얀 피부가 앳되어 보이는 크리스틴은 영어교사 일자리를 구해 한국에 온 지 겨우 3주째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가족과 함께 텃밭(backyard garden)을 가꾸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한 그녀는 한국에서도 텃밭 농사꾼 생활을 계속 이어볼 생각이다.
"유목민처럼 떠돈 삶이 땅에 대한 애착 갖게 해" 오자마자 나무 뒤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두 팔을 걷어붙인 윌(Will). 다른 이들이 잡담을 하는 동안 제일 먼저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와 묵묵히 밭일을 시작한 그는 한양대학교 생물리학(Biophysics) 교수다. 자그마한 체구에 시종일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띤 윌은 벌써 4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버스에서 노인을 만나면 얼른 자리를 양보하는 그의 모습은 꼭 한국 젊은이를 보는 것만 같다. 언젠가 고향인 미국 미시간에 돌아가 농사를 지을 거라고 했다.
"왜 농사를 짓느냐고요? 글쎄요.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도 태국, 일본 등에서 십년 가까이 외국 생활을 했어요. 유목민처럼 떠돌며 살아서 오히려 땅에 더 애착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농사를 지으면 내가 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보다 평화로운 순간이 없어요." 윌은 제자들과 이런 대화를 나눠보고 싶지만,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농사를 기피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그저 높은 학점을 따서 돈을 많이 받는 직장에 취직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더군요. 심지어 농사를 지으면 삶이 퇴보한다고 믿는 것 같아요. 돈을 벌 수 없으니까요. 저는 한국을 좋아하지만, 한국 사회가 오로지 한 가지 목적(물질적 풍요)으로만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슬프기도 해요." 참석자 중 막내는 20대 초반의 한국계 미국인 김용일씨였다. 김씨는 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애틀랜타로 이민을 갔다가 지난해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미국 남부의 광활한 땅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어릴 적부터 농사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고. 지금은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농부가 되어 살고 싶단다. 서울 시티 파머스에 가입한 것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다.
이날 만난 서울 시티 파머스 회원들은 상당수가 한국에서 꽤 오래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양대 교수인 윌도, 영어 학습지 성우로 일하는 브래드도, 영어 강사 커플인 코너와 타냐도 몇 년째 한국 생활을 하는 중이다. 농사라는 것이 땅과 분리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를 짓다보니 애착이 생긴 것일까, 애착이 생겨서 농사를 짓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