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반민족행위자 유물 문화재 등록' 중단 촉구 긴급 회견친일반민족행위자 의복·유물 문화재 등록반대 항일독립운동단체 긴급 기자회견이 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앞에서 열렸다. 기자회견 도중 참석자들은 일제말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인 백선엽의 모형에 일본군국주의 상징인 '욱일기'를 씌우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권우성
'한국사회 생각의 블랙리스트' 중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 '어쩔 수 없지 않냐', '약소국의 운명 아니냐' 하는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서정주를 예를 살펴보면 바로 이해가 되실 겁니다. 1988년 출판된 <팔할이 바람>이라는 시집에 <종천순일파>란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줄임)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이것은 하늘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 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줄임)서정주만큼 논란의 대상이 된 시인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그의 시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항상 붙이는 말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주는…". 우리는 그가 시를 너무 잘 써서 자자손손 말밥에 오르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정주는 일제강점기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았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왕의 신사에 참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시, 소설, 평론에 이르는 그의 '친천황' 작품의 내용은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그의 천황'은 그 외형만 바뀐 채 지속되었습니다. 1980년 광주민중을 학살한 전두환을 위해 TV광고에 출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전두환의 56세 '탄생일'을 맞아서는 <처음으로>라는 축시를 통해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졌다고 칭송했습니다. 하지만 서정주가 '종천순일파'라는 표현을 쓴 걸로 봐서 친일행위를 긍지로 여기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친일을 한 이유는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쩔 수 없다'는 가치관입니다.
물론 모든 이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친일을 강요당하자 김기림같이 침묵하거나 이육사같이 망명을 택한 문인들도 있었고, 일본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작가들도 많았습니다. 문학평론가 김재용 원광대 교수(한국어문학부)는 <협력과 저항>이란 저서에서 "친일 협력을 했던 이들보다 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이 엄연한 문학사적 현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정주는 말년까지도 변명으로 일관한 것이죠. 정신자체가 식민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가치관은 근대 이후 한국사회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변명거리가 되었습니다.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를 두고, '당시 힘없는 나라 백성으로 별 수 없지 않았냐,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이냐 나라 팔아먹은 놈들이 문제지'라는 적극적 방어논리도 등장할 정도니 말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 근대 이후 지식인들의 강력한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