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익 ‘아울러’ 대표.
심혜진
도서관에 들어서자 박 대표가 환한 얼굴로 맞았다. 경북대학교 앞 골목 사이에 위치한 아울러 역시나 책이 많지 않았다. 한쪽에는 카페처럼 주방이 마련돼 있고 테이블 몇 개와 의자가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시원한 차 한 잔 드릴게요." 그의 말투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진하게 묻어난다. "경상도에서 오래 사셨나 봐요?" 하고 묻자,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고, 경북대학교 졸업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가 차가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사람도서관을 처음 시작할 때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았다.
"2011년 4월에 경북대에서 처음 사람책 행사를 열었어요. 졸업하기 전이라 학생회 활동하는 친구를 통해서 공간만 빌렸어요."
그날의 행사는 이랬다. 행사 전 박 대표는 그동안 알고 지내던 몇몇 사람들을 찾아가 사람책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대부분 이전부터 박 대표에게 사람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은 터라 흔쾌히 승낙했다. 그들은 박 대표와 함께 자신의 경험 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추려내 순서를 정하고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행사 당일, 행사장에 탁자와 의자를 군데군데 놓고 사람책들을 소개하는 간단한 안내문을 비치했다. 사람책은 저마다 탁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이제 독자들을 만나기만 하면 된다. 독자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사람책 앞에 가서 앉는다. 그러면 사람책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날 사람책으로 참가한 이들은 인권운동가, 원어민 강사, 해외에서 3년 동안 공동체 경험을 한 사람 등이었다. 독자로 참가한 이들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생생하고, 공감이 많이 갔다' 등 좋은 반응을 들려줬다. 이후 한 달에 한 번, 학교 안에서 주기적으로 사람책 행사를 열었다. 행사 참가자는 점점 늘었고, 지역 언론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자 중에는 '나도 사람책이 되고 싶다'며 관심을 보이는 이도 많았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뿌듯했어요. 계속 할 수 있겠다는 힘을 얻었죠."그에게 사람책으로 이뤄진 사람도서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난감해하는 얼굴이다. 결정적인 '한순간'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 계기를 만나기까지 그는 무수히 많은 과정을 거쳐야했다. 그의 사람책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그는 다섯 살 때 사고를 당해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이후 오랜 시간 병치레를 하며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은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플까. 사람은 왜 살까'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시내로 나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학교 근처에 있던 작은 도서관을 드나들며 처음으로 책에 흥미를 느꼈다. 동서양 철학서적은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을 더 깊이 사유하게 했다. 주역과 관련한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저자인 동국대학교 교수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이후 교수는 고등학생이었던 그가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는 것을 허락했고, 허심탄회한 대화도 자주 나눴다. 교수는 숲이나 생태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대학에서 산림자원학을 전공할 것을 제안했다. 부모가 교사가 되기를 원하며 반대하자, 교수가 직접 부모님을 설득하기도 했다.
"부모님이 교수님을 만나고 나서 좀 놀라신 것 같더군요. 진로에 대해 별 말씀이 없었어요." 그는 결국 산림자원학과에 입학했다.
사람들 만나 바뀐 내 인생, 그래서 시작한 사람도서관대학에 가서도 책읽기는 계속됐다. 고등학생 때보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책 저자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이 손에 들어왔다. 지식인도 노동현장을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화돼 2년 반 동안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했다. 이때 모은 돈으로 그는 인도행 비행기표를 샀다. 교수를 통해 만난 동국대 학생에게 '오르빌 공동체'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오르빌 공동체는 스리오르빈도라는 구루의 철학을 이념으로 한 공동체에요. 철학을 삶으로 실천하는 공동체죠. 부모님께는 '이제부터 경제적인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하는 일은 막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그곳에서 지낸 6개월 동안 그는 "말만 했다"고 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밤마다 영어공부를 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정해진 삶도, 인생의 답도 없었다. 자신만의 기준과 가치에 따라 살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탔다.
2010년 여름엔, 그는 프랑스 떼제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이 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사람도서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 <나는 런던에서 사람책을 읽는다>(김수정 지음)였다. 책에는 덴마크에서 시작한 사람도서관 운동과 사람책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산티아고길을 걸으며 제 인생을 돌아봤어요. 세상을 돌아다니며 얻은 것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자마자 확 꽂혔어요. (웃음) 왜냐하면, 제 인생이 그동안 만난 사람들 덕분에 많이 바뀌었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어요. 내가 사는 대구에서 이걸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대구에 돌아와 그는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에게 사람도서관을 설명하며 의견을 모았다. 누군가는 '전문가들도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누가 듣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생소해 하면서도 그를 응원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2011년 4월 첫 행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나도 사람책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은 잠시 접어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