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파면 사람뼈 나오는 이곳, 언제쯤 상처가 아물까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 노근리 그리고 대전 산내 골령골에 가다

등록 2013.08.01 10:04수정 2013.08.0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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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60년을 맞았다. 전국을 누비는 버스들 상당수는 '감사합니다! 함께 지켜온 60년. 약속합니다! 함께 나아갈 60년'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달고 달렸고, 전국 각지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렸다. 올해 초 북한은 '정전협정 백지화'로 한반도 긴장을 한껏 달궜고, 박근혜 대통령은 '북침이냐, 남침이냐'로 여론을 한껏 달궜으니 이 땅에서 한국전쟁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지난 26일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지 정확히 63년째 되던 날이었다. 이날 대학생 한국전쟁 역사답사 참가자 30여명이 모여 노근리로 떠났다. 정전 60주년 열기 속에서도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그곳으로 말이다.


"북한 김정은은 아직도..."라는 말이 거슬렸던 이유

노근리사건희생자 합동추모행사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노근리사건희생자 합동추모행사노근리 평화공원에서 추모제가 열렸다.최아람

2010년 영화 <작은 연못>으로 대중에게 더 가까워진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7월 26일 미군은 피란민들을 향해 비행기로 폭탄을 투하하면서 기총소사했다. 그 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큰 터널 속에 들어가게 한 다음 터널의 양쪽 입구에서 사람들을 향해 밤낮 없이 3일 동안 기관총을 쐈다. 이 사건으로 22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매년 노근리 평화 공원에서는 이맘때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열린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추모식 3부가 진행되고 있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장관·국회의원·도지사 등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추모사 속에는 '인권'과 '평화'가 넘쳐 흘렀다. 미국에선 끝내 '깊은 유감'만을 표시한 채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았는데, 사건의 본질은 피해 가고 듣기 좋은 말로만 두루뭉술 포장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더군다나 "아직도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이라며 안보를 강조하는 추도사에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전쟁의 책임은 북한에게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거론돼야 할 나라가 있다면 그건 당연히 미국일텐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약속합니다!' 같은 문구로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하는 지금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아스팔트의 열기가 참을 수 없이 답답하게 다가왔다.

우는 아기를 물 속에 수장시킨 아버지


노근리 쌍굴다리 벽면에 기호로 그 날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노근리 쌍굴다리벽면에 기호로 그 날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최아람

노근리 쌍굴다리 노근리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다.
노근리 쌍굴다리노근리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다.최아람

사건 현장인 굴다리 벽에는 동그라미·세모·네모 등의 도형과 숫자가 빼곡히 적혀 있다. 동그라미는 총탄의 흔적이고, 세모는 총탄이 박혀있는 곳, 네모는 박격포의 흔적이다. 영문도 모른 채 3일 동안 총탄을 맞아야 했던 희생자들의 절규가 갖가지 도형과 숫자로만 표현될 수 있을까.

전시관서 봤던 영상 속 애니메이션에는 우는 아기를 물 속에 수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온다. 결국 그 아버지는 사내무당이 됐다가 얼마 전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역사책 속의 글자들이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와 보여질 때, 그 충격과 아픔이 배가 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제 자식의 숨통을 자기 손으로 끊어야 했던 부모가 그 후에 온 정신을 붙잡고 살기에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통신일지에 적힌 "전선을 넘으려는 자 모두 사살하라"는 한 줄의 명령이 몇백 몇천의 삶을 송두리째 바닥부터 헤집어놨다.

답사를 진행하고 있던 순간, 그곳 주민들은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수백의 삶이 억울하게 산화된 그 장소에서 현재의 삶이 계속되고 있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이곳에 올 뿐이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풍경인 것이다. 마치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차량이 통제된 금남로만 보다가 금남로가 본디 차가 다니는 도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과 같다고나 할까.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에 산화한 희생자들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대전형무소 재소자 및 민간인들이 처형되고 있는 모습. 미국의 공개된 비밀 문서에서 발견된 사진이다.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대전형무소 재소자 및 민간인들이 처형되고 있는 모습. 미국의 공개된 비밀 문서에서 발견된 사진이다.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어 우리가 답사한 곳은 산내학살사건(대전형무소사건) 현장인 대전 산내 골령골이었다. 1950년 6월 28일께부터 7월 17일 새벽까지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 검속돼 수감 중이던 보도연맹원 등이 산내 골령골로 끌려와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총 4900명이 학살당했다. 일각에서는 희생자의 규모를 7000여 명으로 보기도 한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m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 것이 다 있었어요. 헌병 지휘관이 국민방위군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 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당시 총살현장을 목격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원의 증언, 산내 학살 유족회 제공 자료 중 발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냄새는 목구멍까지 스며들어와 그 후 며칠 동안이나 그 냄새를 느껴야 했다.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발·무릎·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 예전에 벨젠(Belsen)이나 부쉔발트(Buchenbald)의 나치 살인수용소에 관한 글을 읽으며 그곳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그때의 내 상상이 어처구니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워닝턴 기자의 증언록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 중)

페인트칠·도끼질로 훼손된 학살 현장

훼손된 비석 유가족들이 세운 비석이 돌로 찍혀져 훼손되어 있다.
훼손된 비석유가족들이 세운 비석이 돌로 찍혀져 훼손되어 있다.최아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끝에 2007년 6월부터 약 70여일 동안 유해 발굴 조사가 실시됐다. 그러나 토지 소유주가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으로 토지를 매입할 것을 요구하며 유해 발굴을 거부, 결국 3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는 것으로 조사는 마침표를 찍었다.

학살지 입구에는 교회가 들어서 있다. 조그마한 시골 교회 건물에 "그 좋은 천국을 나 혼자 갈 수 없다, 적극 선교하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방문자는 왕입니다" 등의 문구들이 내걸려 있었다. 학살터 입구에 '이곳은 대전 형무소 보도연맹 산내 학살 현장입니다'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지만, 교회에서 페인트칠을 해놔 얼마 전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 옆 풀숲 속에 존재감마저 희미하게 세워진 추모비도 페인트칠과 돌도끼 세례를 받았다. 비석의 페인트는 지워졌으나 돌로 찍힌 자국들은 생채기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치 6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못한 채 켜켜이 상처만을 안고 살아가는 유족들의 삶을 대신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만일 지금 산내 그곳에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발을 씻겨주던 예수가 살아 있다면 그는 어찌했을까.

발견된 뼛조각 산내 학살지 현장에서 우리 일행이 뼛조각을 발견했다.
발견된 뼛조각산내 학살지 현장에서 우리 일행이 뼛조각을 발견했다.최아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뭐라도 하려고 땅만 파면 유골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이제껏 손도 대지 못한 땅이라고 한다. 그마저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의 유골들은 많이 사라졌다. 유골 사냥꾼들 짓이란다. 사람의 유골을 먹으면 나병에 좋다고, 유골들을 캐 팔았다고 한다. 악(惡)에 기생해 빌붙어 사는 또 다른 악(惡)이라 생각했다. 그곳에 20여분 머무는 동안 일행 중 한 명이 뼛조각을 발견했다. 그 뼈를 건네받은 유족회장은 그저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1960년 4·19 직후에 활동한 전국 유족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피학살자 수가 약 114만 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5·16 쿠데타를 거치며 정부에서 모든 자료를 수거해 갔다. 그 후 민간 실태조사 및 자료추적을 통해 추산한 희생자 수는 약 100만에 이른다. 인민군이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부산에서조차 좌익경력자·보도연맹원등 1만여명이 학살됐다. 당시 일본에서 발행된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와 <주간조일> 등에서는 부산 앞바다에서 철사로 엮어 떠내려온 시체가 어망에 걸려 고기잡이를 못하겠다고 항의하는 대마도 어민들의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했다.

용서와 화해는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을 할 때, 피해자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가해자가 반성은커녕 과거를 부정하고 있는데, 피해자들에게만 용서와 화해를 '요구'한다. 타의에 의한 용서와 화해는 결국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만을 주게 되는데도 말이다.

지난 2009년 민간인 학살지인 '경산 코발트 광산'을 다녀와서 쓴 시를 첨부한다.

<60년>
- 6·25 60년을 코앞에 두고 -         

60번 꽃이 피었다 졌소.
60번 세상도 한 바퀴를 돌았소.
그리고
60번 민주주의도 죽었소.

저녁 나절 안으로는 오겄제. 별일 있겄냐.
그러고 동네 사람들과 어디론가 가더니
60번의 저녁이 지나고 60년의 해가 가도록
왜 돌아오지 않으요, 엄니.

나한티 딱지가 하나 붙읍디다, 엄니.
빨갱이 딸년.
그렇게 60년을 살았소.
그렇게 60년을 따라다녔소.

이제 그 때의 엄니보다 내 머리가 더 하얗소.
세상이 다 변하는디 변하지 않는 게 딱 하나 있습디다.

사람들이 옥상으로 공장으로 들어갔소.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외쳤소.
그런데 높은 사람들은 방맹이를 듭디다.
그리고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릅디다.

엄니.
엄니도 저렇게 가셨소?
저렇게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외치고 빌었소?
그러다가 불에 타죽고, 맞아 죽었소?

엄니.
왜 아직도 이 땅에 계시오.
왜 60년을 더 죽고 또 죽느냐 말이오!

60번 꽃이 피었다 졌소.
60번 세상도 한 바퀴를 돌았소.
그리고 60번
엄니도 죽고 또 죽었소.
#노근리 #민간인 학살 #양민 학살 #한국전쟁 #대전형무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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