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만에 건국포장 받은 아버지 그립습니다

[해외리포트] 광주학생항일운동가 후손인 재독대한간호사협회장 노미자씨

등록 2013.08.13 14:47수정 2013.08.1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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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복 68주년이다. 광복을 맞아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섰던 순국선열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동북아 질서가 극우화와 역사왜곡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에서 일제와 싸운 독립정신을 기리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있다.

이런 가운데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는 재독간호사를 만났다. 바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했던 노병주(1910. 8. 30 ~ 1978. 8. 15, 호적상 사망신고 날짜, 실제는 1977년) 선생의 셋째 딸인 노미자(71) 여사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1969년 파독간호사로서 독일에 건너가 현재 재독대한간호사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젊은이들이 일제에 대항한 의미있는 사건으로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것을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춘채가 이에 분노하며 항의한 사건이 발단이 됐다. 결국 말을 듣지 않은 일본인 학생들로 인해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이는 후에 광주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반일시위운동으로 번지게 되고, 1919년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독립운동가 노병주씨의 딸 노미자씨.
독립운동가 노병주씨의 딸 노미자씨. 최서우

- 아버님께서 말씀해주신 광주학생운동이 궁금합니다.
"아버님께서는 당시 19세였고, 광주고보 5학년 을반 반장이었어요. 박춘채 사건이 일어난 이후 11월 3일은 일본인들이 기념하는 명치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은 우리민족의 명절인 개천절과 겹쳐서 학생들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침묵시위를 했지요.(당시 개천절은 음력 10월 3일이었다.). 이후 광주고보 강당에서 학생대표들과 회의를 했는데, 제 아버지께서는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으로서 앞으로의 시위를 준비하셨어요. 

광주고보 외 다른 광주에 있던 학교들의 거의 모든 조선학생들이 참여해 시가지에서 궐기대회를 했어요. 농민대표들도 같이 참여해서, 총 3만 명이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광주 인구(1935년 기준 4만 6287명)를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집회였습니다. 이것이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일제경찰은 주동자 73명을 체포하였고, 이 중 13명이 최고 금고형을 받았죠. 제 아버지도 금고형(8개월)을 받았던 학생 중 하나였어요.

제 조부께서는 아버지를 극진하게 생각하셔서, 재판이 있었던 대구에 가셔서 추운 날 여관 마룻방에서 주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사건 관련 진술 및 신문자료를 스크랩을 하셨지요. 여관에서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라고 권유했는데도 아들이 감옥에 있는 상황이라 그럴 수 없다고 하셨어요. 이후에는 감옥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후에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 변호사를 위시한 36명의 한국인 변호사들이 매일 6명씩 6일간을 무료로 변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우리 가족들에게 남겨진 중요하고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금고형 이후 아버지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금고형 이후에는 해방 전까지 15년 간 요주의 인물로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여수군 돌산면 군내리는 당시 고립된 섬이라 배를 타고 움직여야 했습니다. 배를 타고 나가기 위해서는 일제 경찰에 일일이 신고를 했어야 되었지요. 거기에 따른 복잡한 행정 절차 때문에 아버지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에 가서 동경제대에 지원하여 시험까지 치렀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지만, 학교에서 신원조회를 하면서 학생운동 경력이 드러나 불합격 처리가 되었지요. 불합격으로 좌절해서 일본에서 방황하던 아버지를 할아버지께서 직접 설득한 끝에 다시 고향으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당시 저희 집안은 증조부께서 전남 고흥에 500마지기 논을 소유하셔서, 지역의 유지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도 군내면 면장을 30년 동안 지내셨는데, 한 때 흉년이 와서 면민전체가 세금을 낼 수 없었던 어려운 상황도 있었는데, 면민 전체의 1년 세금을 한꺼번에 자발적으로 납부하셨어요. 그래서 당시 돌산면민들이 그를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지요.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벼 50섬으로 작은아버지와 사업을 시작했는데 경험부족으로 실패를 경험하셨어요. 학생운동 경력, 형무소에서 고문후유증과 6.25전쟁으로 인해 대퇴부가 상해 평생 취업을 하지 못해서 재산을 탕진하면서 사셨습니다. 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는 항상 결기에 차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또한 당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의 무용담을 지어내며 자신을 주도자로 자칭한 일이 많았어요. 반면 실제 학생운동 시위주도자였던 아버지는 거의 사실상 사망신고된 것처럼 잊혀져 갔지요. 하지만 제 오빠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임관시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상당히 노력을 많이 했는데, 후에 광주독립기념관에서 여수 돌산까지 오셔서 아버지를 만나고,  할아버지께서 소장했던 서류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대구교도소에서 출옥한 광주학생들의 기념사진.
대구교도소에서 출옥한 광주학생들의 기념사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왜 1993년이 되어서야 건국포장이 수여되었습니까?
"아버지께서는 학생운동 이후의 후유증과 사업 및 취업실패로 인해 고생하셨던 데다가 1977년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에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께서 보훈법 발의 및 제정을 주도하였지요. 이후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 보훈번호를 수여받았어요. 후에 노무현 정권 때는 과거 역사에 대한 복원작업이 활발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2007년도에 다른 지역에 있었던 저의 부모님 묘소가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656호에 이장되었습니다. 이장되던 날 감회가 새롭더군요. 늦었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의 진실이 다시 세워지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요."

파독 간호사로서의 삶

- 독일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처음 하셨던 일은?
"원래 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할머니의 만류로 간호사가 됐습니다.  후에 순천에서 간호사 경력을 쌓다가, 해외개발공사의 파독간호사 신문공고를 보고 지원했지요. 경쟁률이 10대 1이었는데,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했어요. 보건소 생활만 했던 저는 어느 분야에 대해 지원할까 고민했었는데, 한 언니가 이비인후과가 편하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지원이 받아들여졌어요. 하지만, 이비인후과 간호사의 경우 섬세함이 요구가 되는 직업이라 만만치가 않아서 후에 수술실 간호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수석간호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2004년 퇴직하기 전까지 수술실 수석간호사, 이후에는 성대 및 아동청각장애자(독일에서는 특수한 분야)를 위해 10년 간 일했습니다.

저는 독일인과 결혼을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독일인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는 아버지가 '나치 독일'이라고 하시면서 반대를 심하게 하셨지만,  결혼 후에는 사위와 대화해야 한다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홀로 독일어를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아버지 짐 안에는 독일어 회화책이 가득했었습니다. 가슴이 찡했지요."

- 재독한인간호사협희는 어떤 곳인가요?
"사실 제가 정치외교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간호사가 됐잖아요. 그런 열정이 남아서 그런지 독일에 와서 파독간호사들의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모임을 조직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1983년 당시 본 대사관에 노동부에 파견된 노무관이 있었는데, 간호사협회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어요. 1985년 9월 21일에 본 대학 이비인후과 강당에서 발기 및 창립총회를 열었어요. 제가 창립총회의 의장을 맡았는데, 당시 가장 최고령자였던 고 박상기 여사께서 초대협회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9년에 회장을 맡아서 이를 이끌었고, 올해도 다시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재작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파독간호사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간호구술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당시 저와 이에 참여했던 간호사들은 소중한 기록을 위해 장장 8시간 동안을 인터뷰를 했었지요. 이는 현재 2장의 CD로 기록되어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허위경력으로 간호사 협회에 가입하려는 사건도 있었던지라,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간호사 심사조건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지요." (파독간호사로서의 경험 및 파독간호사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으로 인해, 1997년 노미자 여사는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정치는 깨끗하고, 정직하고 투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해 보입니다.  더 이상 눈치보고, 몸사리고, 책임회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사태는 상당히 서글픈 일입니다."

-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야하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리고 통일에 대한 견해도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자기 의견만 맞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국회에서는 사소한 일로 싸우는 일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유·불리를 떠나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서로 포용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특히 재산을 가진 자들은 재산으로 자기를 과시하기 보다는 힘이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사회에 기여를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저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 한국 땅에 이들이 상당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소외 당하거나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유럽국가로 이민을 떠난다든가 심지어는 월북을 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통일은 이들을 사회적으로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봅니다. 서독도 사실 동독에서 장벽을 넘어 탈출한 이를 감싸안는 것에서 통일을 시작했습니다. 탈북주민들과의 지속적인 대화가 광복 다음의 과제인 통일로 가기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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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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