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도소에서 출옥한 광주학생들의 기념사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왜 1993년이 되어서야 건국포장이 수여되었습니까?
"아버지께서는 학생운동 이후의 후유증과 사업 및 취업실패로 인해 고생하셨던 데다가 1977년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에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께서 보훈법 발의 및 제정을 주도하였지요. 이후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 보훈번호를 수여받았어요. 후에 노무현 정권 때는 과거 역사에 대한 복원작업이 활발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2007년도에 다른 지역에 있었던 저의 부모님 묘소가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656호에 이장되었습니다. 이장되던 날 감회가 새롭더군요. 늦었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의 진실이 다시 세워지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요."
파독 간호사로서의 삶 - 독일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처음 하셨던 일은? "원래 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할머니의 만류로 간호사가 됐습니다. 후에 순천에서 간호사 경력을 쌓다가, 해외개발공사의 파독간호사 신문공고를 보고 지원했지요. 경쟁률이 10대 1이었는데,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했어요. 보건소 생활만 했던 저는 어느 분야에 대해 지원할까 고민했었는데, 한 언니가 이비인후과가 편하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지원이 받아들여졌어요. 하지만, 이비인후과 간호사의 경우 섬세함이 요구가 되는 직업이라 만만치가 않아서 후에 수술실 간호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수석간호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2004년 퇴직하기 전까지 수술실 수석간호사, 이후에는 성대 및 아동청각장애자(독일에서는 특수한 분야)를 위해 10년 간 일했습니다.
저는 독일인과 결혼을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독일인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는 아버지가 '나치 독일'이라고 하시면서 반대를 심하게 하셨지만, 결혼 후에는 사위와 대화해야 한다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홀로 독일어를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아버지 짐 안에는 독일어 회화책이 가득했었습니다. 가슴이 찡했지요."
- 재독한인간호사협희는 어떤 곳인가요? "사실 제가 정치외교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간호사가 됐잖아요. 그런 열정이 남아서 그런지 독일에 와서 파독간호사들의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모임을 조직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1983년 당시 본 대사관에 노동부에 파견된 노무관이 있었는데, 간호사협회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어요. 1985년 9월 21일에 본 대학 이비인후과 강당에서 발기 및 창립총회를 열었어요. 제가 창립총회의 의장을 맡았는데, 당시 가장 최고령자였던 고 박상기 여사께서 초대협회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9년에 회장을 맡아서 이를 이끌었고, 올해도 다시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재작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파독간호사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간호구술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당시 저와 이에 참여했던 간호사들은 소중한 기록을 위해 장장 8시간 동안을 인터뷰를 했었지요. 이는 현재 2장의 CD로 기록되어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허위경력으로 간호사 협회에 가입하려는 사건도 있었던지라,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간호사 심사조건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지요." (파독간호사로서의 경험 및 파독간호사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으로 인해, 1997년 노미자 여사는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정치는 깨끗하고, 정직하고 투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해 보입니다. 더 이상 눈치보고, 몸사리고, 책임회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사태는 상당히 서글픈 일입니다."
-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야하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리고 통일에 대한 견해도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자기 의견만 맞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국회에서는 사소한 일로 싸우는 일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유·불리를 떠나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서로 포용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특히 재산을 가진 자들은 재산으로 자기를 과시하기 보다는 힘이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사회에 기여를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저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 한국 땅에 이들이 상당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소외 당하거나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유럽국가로 이민을 떠난다든가 심지어는 월북을 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통일은 이들을 사회적으로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봅니다. 서독도 사실 동독에서 장벽을 넘어 탈출한 이를 감싸안는 것에서 통일을 시작했습니다. 탈북주민들과의 지속적인 대화가 광복 다음의 과제인 통일로 가기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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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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