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거리(2004. 1. 31.).
박도
이민생활1977년 8월부터 미국 엘에이에서 준기의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준기의 취업조건은 취업이민 스폰서 역할을 해준 엘에이의 한 병원에 의무적으로 3년을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그것도 방사선기사가 아닌 방사선기사의 조수직이었다.
준기는 그 병원에서 주로 허드렛일을 했다. 병원에서 가장 힘든 일이거나 더러운 일, 자질구레한 일 등은 모두 준기의 몫이었다. 카트로 엑스레이 찍을 환자 나르는 일, 병원 각과로 엑스레이 필름 나르는 일, 방사선실 청소, 아이들을 엑스레이로 검진할 때 그들을 달래고 붙잡는 일 등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준기의 주급도 미국인보다 훨씬 적었다. 그가 일하는 시간도 주로 밤 아니면 새벽이었다. 그 무렵 준기의 아메리칸 드림은 그에게는 그야말로 꿈이었다. 준기는 초기 이민생활이 외롭고 너무 힘들어 어느 하루 태평양 연안 샌타모니카 해변으로 가서 고국 쪽을 바라보며 속눈물을 흘린 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내레 요기서 반다시 성공하여 아바지 오마니를 만나러 갈 거야.'준기의 미국이민 생활은 시계바늘처럼 늘 팍팍했다. 준기는 미국 이민생활에서 인천 황재웅 원장이 일깨워 주던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더욱 뼈저리게 가슴에 닿았다. 그래서 준기는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도 엘에이의 한 초급대학에 입학하여 무섭게 공부했다. 그러자 모든 잡념도 다 달아났다.
준기는 미국에 오면 최순희를 자주 만날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일 년에 두어 차례, 그것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휴가, 그리고 여름휴가 때 이삼일 정도 만날 수 있었다.
그나마 때로는 상대의 사정으로 휴가를 건너뛰기도 했다. 엘에이에서 시카고까지는 비행기로도 네 시간 거리라 항공료도 만만치 않았다. 이민 초기에는 매번 미국생활에 익숙하고 주머니 형편이 나은 순희가 엘에이로 날아왔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영혼과 몸이 함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만남은 늘 짧고도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