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 하우스와 가짜 괴테 그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여행기

등록 2013.09.09 11:14수정 2013.09.0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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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을 지리적 위치에 의해 다시 나누면 서부 유럽(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 북부 유럽(아이슬란드 ·스칸디나비아 3국), 중부 유럽(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남부 유럽(지중해 연안 국가), 동부 유럽(러시아 ·벨 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 ·불가리아 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난해는 동부 유럽과 중부 유럽 몇 나라를 여행했으나 올해에는 독일만 여행하기로 했다.

유럽의 광활한 땅 어디를 가도 지평선이 보이는 독일 남부 들판을 기차 속에서 촬영한 것이다. 저 넓은 땅이 모두 농토다.
유럽의 광활한 땅어디를 가도 지평선이 보이는 독일 남부 들판을 기차 속에서 촬영한 것이다. 저 넓은 땅이 모두 농토다.김준식

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은(물론 개인차가 크겠지만) 넓고 평탄한 대지와 그로부터 나오는 생산물이 오늘날의 유럽을 만들지 않았을까 였다. 특히 중·서부 유럽지역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땅 중에서 가장 농업생산력이 뛰어난 땅들 중의 하나이다. 기후 조건이 좋은데다, 일찍부터 농업이 시작된 탓에 관개시설이 우수하다. 그 덕에 이 지역은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고 지금도 세계경제와 문화의 막강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 중 독일은 유럽 대륙의 중앙에 자리 잡은 곳으로서 북으로는 북해와 발트 해, 그리고 덴마크를 이웃하고 있다. 남으로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와 경계를 이루며 체코와 프랑스를 각각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나라이다. 면적은 남한의 약 4배 정도이고 국토의 대부분은 준평원 지역으로서 농업생산이 가능한 탓에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왕국들이 번성했다. 특히 제1차 대전을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일으켰고 제2차 대전은 추축국으로서 세계역사에 이름을 남긴 나라이다.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으로서 각 주 정부와 연방 정부와의 관계는 우리의 지방자치와는 매우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의 각 주정부는 각각의 독특한 자체역사를 가지고 있으며(특히 남부의 바이에른 주는 독립된 왕국이었다) 북쪽의 함부르크나 브레멘은 특별한 역사 덕에 시 단독으로 한 주를 이루고 있을 정도이다.

유럽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 각 지역의 경제적 독립성에 기인하는데 현재의 독일영토와 프로이센의 영역이었던 지역은 더욱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가 멸망한 자리에 세워졌던 프랑크 왕국을 기점으로 하여 오늘날 독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혼돈 그 자체이다. 하지만 독일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다른 유럽 여러 나라에 비해 비교적 민족성과 국가 의식의 관계가 매우 견고했다. 게르만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했던 히틀러의 나치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이 그 분명한 증거이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독일 헤센 주(州)에 있는 상업중심 도시로서 라인 강의 지류인 마인 강이 시내를 관통하고 있다.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다. 1815년 빈 조약으로 독일의 4개 자유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816년에는 독일연방 의회의 개최시가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항공·철도·자동차 교통의 요지가 되었으며, 독일의 경제·금융의 중심지로서 주식·상품거래소가 있고 유럽 중앙은행이 이곳에 위치해 있다.

특히 독일의 대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유명하며 뢰머광장과 그 옆에 있는 대성당이 중요한 관광명소이며 연중 좋은 기후 덕에 사과농업이 발달하여 아펠바인이라는 사과와인으로 유명하다.


뢰머광장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광장이다. '뢰머(로마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과거 로마 군이 주둔한 곳이라 뢰머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광장 앞의 3개 건물은 시청사로 사용한 귀족의 저택이다.

오스트차일레 비단무역의 장소였던 곳이 지금은 까페로 활용되고 있었다.
오스트차일레비단무역의 장소였던 곳이 지금은 까페로 활용되고 있었다.김준식

광장 주변에는 구시청사와 오스트차일레가 있다. 구시청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대관식이 끝난 후에 화려한 축하연을 베풀었던 곳이며, 프랑크푸르트 최초의 박람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405년부터 시청사로 사용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구시청사 맞은편에 있는 목조건물들을 통칭 오스트차일레라고 하며, 본래는 15세기에 쾰른의 비단상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정의의 여신 칼과 저울, 저것으로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
정의의 여신칼과 저울, 저것으로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김준식

광장 중앙에는 정의의 여신 동상이 서 있었는데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상에 대해 이야기 하면 유스티티아(그리스 신화에 디케)는 신들의 왕 제우스와 율법의 여신 테미스 사이에 낳은 딸이다. 테미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 태어난 티탄 12남매 (6형제, 6자매) 중에 막내딸이다. 그리고 남자 신 중에 막내가 바로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인 것이다. 그러니 족보를 따지면 테미스가 제우스의 고모인 것이다. 고모와 결혼하여 낳은 딸인 셈이다. 참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이런 전통은 서양 왕가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합스부르크 왕가도 이러한 결혼 방식(혈통 보존) 탓에 종말을 고하고 만다.

어쨌거나 그녀는 눈을 가리고, 천칭과 검을 들고 있다.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보기 위함을 상징하며, 천칭은 공정함, 검은 천벌을 상징한다.

독일의 법학자 라드부르흐는 그의 저서 <법철학>에서 법률가가 제정법의 보편개념의 안경을 통하여서만 개개의 인간과 사건을 보는 것을 테미스의 눈가리개를 통해 인간과 사물의 대체적 윤곽만 보는 것에 비유했다.

중국관광객이 점령한 뢰머광장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오전 일찍 인 관계로 거리 공연은 없었지만 몇 몇 사람들은 벌써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 이곳에도 변함없는 일상이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마인 강

독일 중남부 피히텔 산맥에서 발원한 붉은(rot)마인과 흰(weiß)마인이 바이에른 주 쿨름바흐에 합쳐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지나 독일 남서부 마인츠에서 다시 라인 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마인강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관통하고 있는 마인 강. 물빛이 탁하다.
마인강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관통하고 있는 마인 강. 물빛이 탁하다. 김준식

붉은 색과 흰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강물은 당연히 맑지는 않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토양과 암석이 석회암과 붉은 사암(라테라이트 토양과 비슷한 색)으로 이루어져 아마도 그렇게 강 이름을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인 강은 예전부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중심으로 한 공업지대의 중요한 내륙수로(운하)로서 역할을 담당했고 동시에 인근지역에 충분한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강의 남쪽에는 포도농사의 원천이 되었다.

강변에서 보니 거대한 첨탑이 보인다. 바로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이다. 유럽 어디를 가도 거대한 성당이 도시 중심부에 있다. 그리고 그 앞은 대부분 큰 광장이 있다. 아마도 처음 성당이나 교회가 세워진 중세의 그 시절 그들의 삶의 시작과 끝은 교회 광장으로부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프랑트 푸르트의 대성당 이 지역 특유의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성당
프랑트 푸르트의 대성당이 지역 특유의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성당김준식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서 1562년부터 230년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붉은 색의 기둥이 이채롭다. 고딕 양식은 지붕을 높이 뽑아 올리는 바람에 벽체에 하중을 줄일 수 있어 유리창을 내고 거기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 놓았다. 신의 나라로 향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색색의 유리로 성스런 분위기의 문양을 창조해 놓았다.

괴테하우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났다. 바로 이 도시에서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의 대가가 태어난 것이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넉넉한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요구대로 처음에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 개업을 하였지만 문학에의 열정을 포기 할 수 없었다.

괴테하우스 괴테하우스를 알리는 간판. 아침부터 사람이 많았다.
괴테하우스괴테하우스를 알리는 간판. 아침부터 사람이 많았다.김준식

친구였던 요한 케스트너의 비극적 자살을 소재로 하여 20대 후반의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소설 속 베르테르의 행동을 따라하고 심지어 자살가지 하는 일이 생길만큼 유명해져 하루아침에 괴테는 저명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 괴테가 청년시절을 보낸 집을 다시 개보수하여 그의 손길이 묻은 여러 물건들을 전시해 놓고 괴테의 집이라 하니 많은 사람들이 괴테를 느끼기 위해 아침부터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있었다. 물론 괴테는 이십대 중반 이후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떠나 바이마르에서 공직 생활을 했고 그 후 바이마르에서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무덤도 바이마르에 있다.

이제는 그가 살았던 시절의 흔적조차 지워진 그의 집이었지만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그들의 위대한 선조를 배우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태도는 매우 진지해 보였다.

괴테 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예술품 중 괴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탈리아 여행의 한 장면을 묘사한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이 그린 '캄파냐 평원에서의 괴테'라는 그림이 있었다. 괴테 하우스에 있는 괴테 그림이니 당연히 진짜라는 생각에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른 뒤 자세히 보니 진품은 이 도시에 있는 슈테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왠지 속은 듯 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는데 꼭 위대한 괴테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우리에게도 여행은 삶에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는 중요한 원천이 된다. 하물며 위대한 괴테의 여행임에야 말할 필요가 없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다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로마 땅을 밟게 된 그날이야말로 나의 제2의 탄생일이자 나의 진정한 삶이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된다. 로마에 와보지 않고서는 여기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를 전혀 알 수 없다.' 

괴테 나이 37세 시작한 이탈리아 여행은 약 2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여행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 뒤의 괴테 전 생애를 걸쳐 두고 두고 이 여행으로부터 많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전주의의 영감을 제공받는다.

슈테델 미술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 중의 하나로서 프랑크푸르트 은행가인 슈테델의 헌금으로 설립하였다. 앞에서 말한 '캄파냐 평원에서의 괴테' 진품이 전시된 곳으로서 약 10만점의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괴테 하우스에서의 실망을 만회하기 위해 오래 그 그림을 보았다. 왠지 약간은 거만해 보이는 괴테 뒤로 폐허의 이탈리아 유적이 있는 그 그림은 1786년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알게 된 티슈바인이 이듬해 괴테와 함께 나폴리를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캄파냐 평원은 나폴리와 폼페이 그리고 소렌토의 근간이 되는 평원이다.

렘브란트, 모네, 르느와르, 꾸르베 등 중세 독일·네덜란드 회화, 14~18세기 이탈리아 회화 등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20세기 초 독일 화가 한스 토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스 토마는 풍속·정물·종교·신화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작업했으나 남독일의 전원·산악풍경화와 가족·농민·어린이 등을 묘사한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 많았는데 특히 그의 초상화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풍경화는 낭만적 분위기가 풍기면서도 약간은 소박한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 많았다. 그 풍경화 중 일부 그림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읍내 이발관에 가서 한참 동안 아버지 면도를 지켜보다 지루하고 졸린 눈으로 바라 본, 이발관 벽에 걸려있는 풍경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그림들의 운명은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다.

미술관의 넓이와 전시 공간은 매우 크고 넓었으며 그 그림들에 맞춰진 조명과 적절한 컬러의 벽체로 꾸며져 있었다. 가끔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느끼는 몇 몇 유명 화가의 작품 서너 점과 이름 모를 작가의 그림 여러 점을 섞어 전시하는 급조된 분위기와는 너무 달라 부러운 맘과 함께 척박한 우리 전시문화가 안타까웠다.

작센하우젠과 유럽중앙은행

사과 농업으로 해서 생긴 사과주가 유명한 지역이 바로 작센 하우젠이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사과주거리쯤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거리 입구 도로 바닥에 작센하우젠 거리 전체 지도가 그려진 황동쇠판이 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고 보도블록 곳곳에는 사과모양의 황동판이 보였다.

작센하우젠 안내판 황동으로 제작하여 길바닥에 매설한 부근 지도
작센하우젠 안내판황동으로 제작하여 길바닥에 매설한 부근 지도김준식

지역의 명소를 알리는 방법은 민족과 역사 그리고 문화와 풍토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양이다. 우리의 문화와 비교해보니 장소의 지명도는 홍보가 더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국의 여행자인 나의 눈에 보이는 작센하우젠은 그저 그런 동네 술집골목(아펠바인을 주로 파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유럽중앙은행이 있다. 약칭은 ECB이다. EMU(Economic and Monetary Union: 유럽 경제 통화 동맹)가 발족하면서 각 회원국의 개별 화폐가 소멸되자 유럽 통화정책에 관해 집단결정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회원국의 통화 주권을 인수하고 유럽 공동의 통화금융정책을 지휘하는 일을 맡는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설립취지와는 달리 지금 유럽은 국가별로 심각한 경제적 차이로 골치를 앓고 있다. 최근의 IMF 지원을 받은 그리스, 스페인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하지만 이 나라 독일은 그 중 몇 되지 않는 예외 국가다. 독일은 1998년 유로화 통합이후 슈뢰더 및 메르켈의 경제정책 덕에 현재는 유럽에서 가장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통일 이후의 동서의 문화적 차이와 역사 및 농 ․ 공업의 생산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남북의 문제가 해결과제로 남아있다.

유럽중앙은행 유럽중앙은행 앞. 유로화의 화폐단위를 상징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유럽중앙은행 앞. 유로화의 화폐단위를 상징하고 있다.김준식

덧붙이는 글 이 여향은 2013년 8월 19일 ~ 9월 2일 다녀왔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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