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전경아버지가 거주하고 있는 대평리의 두진아파트에서 바라본 세종시의 모습.
김동이
무척이나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산과 들에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풍성한 가을, 추석을 맞아 실로 여름휴가 이후 오랜만에 아버지가 계신 고향 세종시로 향했다. 우리 가족의 명절은 형제나 친척들이 모여들어 시끌벅적한 다른 집과는 달리 막내동생 부부와 조카, 아버지, 그리고 내가 전부였다.
대전에 살고 있는 동생 부부가 명절준비도 해 오는 탓에 가족이 한데 모여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는 풍경은 없다. 내 임무는 늘 그랬듯이 차례에 모실 조상님들 지방만 한지에 펜으로 쓰는 것이다.
이번 명절에는 이미 지방을 준비해 놓은 탓에 한결 여유가 있었다. 하여 그동안 여러 이유로 찾지 않았던 고향 마을을 찾았다. 2010년 추석에 마지막으로 찾았으니 꼭 3년만이다.
고향마을 가는 길에 만난 모교와 냇가... 추억도 새록새록우리가족이 살았던 세종시 반곡동(당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 건설지역에 포함되어 보상을 받았다. 지난 2008년부터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우리가족도 2008년 2월 설 명절을 마지막으로 그 해 4월 13일 고향을 떠나왔으니 고향을 떠난 지 벌써 5년이 넘었다.
지난 2010년 추석. 고향을 방문했을 당시 사람들이 떠나 마을은 텅 비어있었지만 눈에 띌 정도로 많은 가옥이 남아 있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사라졌지만 옆집의 담벼락과 윗집에는 아직 마을 주민이 살고 있어 집 위치를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지금, 2010년 당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가옥을 부수고, 중장비로 밀어버렸다 해도 '내가 30여 년을 넘게 살았던 내 집터 하나 찾지 못할까'생각했다.
이번에는 네 살, 여덟살짜리 조카들이 기꺼이(?) 동행해 주었다. 하긴 고향마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조카들의 아빠,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았던 삶의 터전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았다. 반 강제적으로 조카들을 차에 태웠으니 선뜻 나섰다기 보다는 억지로 삼촌 손에 끌려 왔다는 게 더 맞겠다.
고향마을로 들어가기 전 아버지와 얼마 전 고향마을을 다녀온 동생이 한마디 거든다.
"얼마 전까지 마을 중앙에 농협창고도 그대로 있고, 대여섯집이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는데... 그리고 우리집 마당에 어머니가 심었던 감나무도 그대로 있고. 감나무 봐야 집터 찾을 수 있을 걸.""그래? 아무리 그래도 집터 하나 못 찾을까."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조카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찾는 고향에 대한 향수는 설렘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