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판에 파랗게 자라나는 비름 나물
이정혁
출발 직전까지는 나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스케줄 조정이며, 사진 촬영 연습 등등. 장모님께서 트렁크 가득히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어머님?""예전에 엄마한테 갈 때 싸가던 것이 습관이 돼서 빈 손으로 가기가 좀 거시기 허네, 가서 생전에 친하게 지내시던 이웃들도 좀 나눠 주고…."엄마라… 그랬구나, 우리 장모님에게도 엄마가 있었구나, 엄마 없는 고향집에 가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구나.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아내는 진즉에 눈치 못 챘냐는 표정으로 살짝 눈을 흘겼다. 그 순간, 나는 이 여행의 취지가 180도 바뀔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사진 촬영을 위한 단순한 길 떠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 아내의 엄마가, 그 엄마의 엄마가 작년까지 살고 계시던 고향집에, 시집보낸 지 5년이 넘은 자신의 딸과 함께 찾아가는 일종의 성지순례 비슷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이 여행의 본질이 될 터였다.
상황을 비교적 빨리 파악하고 나자,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언젠가 나도 엄마가 안 계신 고향집을 찾아갈텐데, 엄마처럼 반겨주는 이 없이 빈 집만 덩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래서 장모님과 아내의 여정을 조심스럽게 뒤쫓아가보기로 했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단조로운 시선의 이동과 감정의 미세한 변화를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지 그 흔한 맛집 소개나 관광지 소개 등은 전혀 없다. 그저 어느 모녀의 외출을 뒤따라간 소소한 기록이라고나 할까?
일찌감치 장모님께서 챙겨주신 아침상 받아먹고 차에 오른다. 내비게이션 상의 거리만으로도 5시간 남짓 걸리는 전남 고흥 반도의 섬 아닌 섬, 거금도. 거금도라는 명칭은 예전에 커다란 금맥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록도 하면 금세 알아차리지만 거금도 하면 어디 붙어있는 섬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바로 소록도 아래쪽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큰 섬이 거금도이다. 2011년에 거금대교가 완공됨으로써 이제는 섬 아닌 섬이 되어 버렸지만 아직까지 개발이라는 어둠의 손길이 많이 뻗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섬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