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한국의 집' 앞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직후부터 '옛 권력의 중심' 창덕궁과 '새 권력의 중심' 총독부를 잇는 도로를 만들어 조선의 옛 지배층을 통제하려 했다. 그 결과 충무로 '한국의 집' 앞과 창덕궁을 잇는 이 도로가 만들어졌다. 순종 황제는 매년 새해마다 이 길을 통해 총독부로 와서 일본 천황에게 '신년하례' 전보를 보내야만 했다.
강선일
이어서 첫 행선지인 한국의 집으로 향했다. 한국식 전통 혼례를 치르는 장소로 인기 끄는 장소로만 알고 있던 한국의 집, 이곳이 조선 총독부의 '2인자'였던 역대 정무총감들의 관저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당시 건물만 없을 뿐, 정무총감 관저 공간을 그대로 이어받아 해방 이후 한국의 집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의 흔적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집 뒤쪽에 있는 비밀 방공호 흔적이었다. 이곳은 현재는 김치 저장고로 쓰이고 있었다.
바로 옆쪽에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은 예전에 학교에서도 몇 번 방문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 이 자리에 옛 수도경비사령부(아래 수경사, 현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옥 마을 입구로 들어와 약간 언덕을 오르다가 구석에 있는 표석을 봤다. 표석엔 이곳이 옛 수경사 자리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 소장은 이곳에 수경사가 들어서기 이전엔 일제의 한국 주차군 사령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주차군 사령부는 1904부터 1908년까지 존재했다. 러일전쟁 당시 이곳에서 한국의 무력 점령, 치안 확보, 방비 등이 획책되었다.
이 소장은 이곳 주변의 당시 이름을 일제가 '장곡천정(長谷川町)'이라 붙였는데, 이 '장곡천'은 제2대 조선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기리고자 붙인 이름이라 한다. 심지어 수경사 표석이 있던 잔디밭 일대는 당시 '호도원(好道園)', 즉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이름이 붙은 정원이었다 한다. 주차군 사령부가 있던 자리를 이승만 정권 당시엔 헌병대 사령부가 썼고, 그 이후엔 수경사가 그대로 썼다고 한다. 이 소장은 "이곳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과거에 쓰던 자리를 거의 그대로 우리나라 군대가 썼던 일들이 많다"고 했다.
"정보부 가는 길,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렸으면..." 다음 동선(動線)은 남산의 옛 중앙정보부 관련 흔적들을 돌아보는 길이었다. 더운 날씨에 힘겨워하며 길을 가던 중, 좌측에 한 터널이 보였다. 이순우 소장은 바로 이 터널이 과거 정보부에 체포된 사람들이 끌려가던 길이라며, 이 터널을 지나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터널은 알록달록 채색이 되어 있었지만, 낮 시간임에도 뭔가 서늘하고 음침한 느낌이 들었다. 중앙정보부가 그들 입장에선 '위치 선정'을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국가정보원이 위치한 서초구 세곡동도 대모산 기슭의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있다.
현재는 서울 유스호스텔이 들어선 위치. 이곳이 바로 옛 중앙정보부 본관이 있었던 자리다.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고통에 시달렸던 곳, 바로 그 현장에서 당시 고초를 겪었던 민주화 운동 원로 이해학 목사의 체험담을 들었다. 전망이 탁 트인 유스호스텔 옥상에서 이 목사의 이야기를 약 50분 가량 들었다. 이 목사는 1973년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여러 활동을 하던 중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실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