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송악산에서 찍은 백마.
김종성
그런데 삼별초를 진압할 목적으로 탐라를 침공한 몽골은 이 섬의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목민 출신인 그들에게 이 섬이 매력적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들은 제주도의 말과 목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중국측 관점에서 기록된 몽골 역사서인 <원사>에 따르면 1273년에 삼별초의 제주 항쟁을 진압한 직후에 몽골 조정에서는 탐라를 빼앗자는 정부 차원의 결의가 나왔다. 몽골은 1273년에 군사·행정 책임자인 다루가치를 탐라에 설치하고 이곳을 군사 활동을 위한 보급 기지로 설정했다.
1273년에 몽골은 탐라 및 전라 지역에서 300백 척의 해군 선박을 건조하고, 1277년에는 탐라에 목장까지 설치했다. 참고로 유목민 출신 국가인 몽골이 해군 선박을 건조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계 제국으로 등극한 이후에 몽골은 해상 전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몽골은 1294년에 탐라 지배권을 고려에 넘겨준 뒤에도 섬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몽골 목동들은 이곳에서 계속 활동했고, 몽골인들 중에는 토착세력과 손을 잡는 이들도 있었다. 훗날 이들은 탐라에 계속 남아 육지 정권에 대한 현지인들의 저항을 지원하기도 했다.
탐라로 수도를 옮기고 싶었지만삼별초를 진압할 목적으로 탐라에 군대를 보냈다가 탐라의 매력에 푹 빠진 몽골인들은 급기야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세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고려사> '공민왕 세가'에 나온다.
공민왕 16년 2월 17일(음력), 1367년 3월 17일(양력). 주원장을 비롯한 중국인 저항세력의 반란으로 몽골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탐라를 거쳐 고려를 방문한 몽골 사신이 후한 선물을 들고 고려 수도 개경을 방문했다.
사신은 공민왕뿐만 아니라 대신들에게도 비단을 두루 나누어주었다. 선물을 분배한 뒤 사신은 몽골 황제 토곤테무르칸의 희망사항을 전달했다. 대도(몽골 수도, 지금의 북경 절반과 그 위쪽)가 점령될 경우에 몽골 황제가 탐라로 도읍을 옮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려 정부의 반대로 몽골 황제의 희망은 깨졌다. 결국 이듬해인 1368년에 대도가 점령되자 몽골은 할 수 없이 북쪽 몽골초원으로 수도를 옮겼다. 초원으로 간 몽골 정부는 1402년에 멸망했다. 몽골인들이 고향인 몽골초원보다 탐라를 우선적인 피난지로 생각했다는 것은 이 섬이 그들에게도 매력적인 곳으로 비쳤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탐라는 탐나는 곳이다.
탐라가 한때는 제주도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보유했고, 한반도 남해보다 훨씬 더 큰 바다에서 활약했으며, 세계 최강 몽골까지 이곳에 거점을 만들려고 했다는 점. 이는 우리에게 탐라와 제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한다. 한반도 남쪽 끝의 섬이 아니라 동아시아 바다의 중심지로서의 탐라와 제주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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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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