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이 '신'일 때, 엔지니어들은 '하인'이 됐다

[삼성'을' 살다-연속 인터뷰③]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평택분회 이상길 총무

등록 2013.11.05 08:25수정 2013.11.05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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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이 출범한 지 100여일이 조금 넘었다. 모든 사람이 삼성전자서비스의 직원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실제로는 삼성전자서비스가 간접고용한 사람들이었고, 그마저도 위장도급 논란이 일었다. 또한 얼마 전에는 삼성의 노조파괴 문서가 폭로되기도 했다. 이즈음 우리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맨 얼굴'을 보고 싶었다. 삼성전자서비스의 진짜 사장이 누구인지,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돌아보고자 한다. - 기자말

대부분의 삼성전자서비스 엔지니어(아래 A/S기사)들이 그렇듯이, 이상길씨 역시 커다란 이야기보따리를 품고 있었다. 세상이 그들의 존재를 몰랐던 지난 나날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데 털어놓을 곳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언론 인터뷰'란 무척 설레는 일이 아니었을까. 지난 달 26일 영등포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내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 그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택센터에서 내근 아이티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고치는 일이죠. 노동조합(평택분회)에서는 총무를 맡고 있고요."

'내근·외근', '가전·아이티·애니콜'은 엔지니어들 각각의 업무 특성을 가리킨다. 센터 안에서 일하면 '내근직', 방문 수리를 하면 '외근직'이다. 담당 제품군에 따라 '애니콜 엔지니어'(휴대폰), '가전 엔지니어'(에어콘, 냉장고 등), '아이티 엔지니어'(PC, 노트북, 프린터 등)라고 부른다. 현재 노동조합원의 상당수는 외근직들이다. 내근직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저도 외근직을 해봤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요. 내근직이 외근직보다 나은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일단 일요일과 국경일에는 쉬어요. 그리고 임금이 비교적 높죠. 특히 애니콜 엔지니어들은 임금이 꽤 높은 편입니다. 가전, 아이티는 애니콜만큼 높지는 않지만, 같은 제품군을 담당하는 외근직보다는 높습니다. 사실 같은 제품이면 건당 수수료는 같거든요. 그런데 외근직들은 방문수리를 하기 때문에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건수가 적은데, 방문의 대가로 받는 출장비는 (회사에서 일정 금액을 떼어 가기 때문에) 턱 없이 적어요. 게다가 움직일수록 기름값이 들죠."

건당수수료 체계와 차량유지비 때문에 내근직과 외근직의 임금차이가 발생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보니, 내근직의 노동강도와 노동시간 또한 외근직 못지않게 심각했다. 성수기에 가전·아이티 엔지니어는 하루에 20~30건 이상, 휴대폰 엔지니어는 70~80건 이상을 처리한다.

오전 8시까지 출근하고, 서비스 센터 운영이 끝난 후에도 이런저런 일 처리를 하고 나면 오후 7~8시에 퇴근한다. 하루 근무시간이 11~12시간에 달하지만 휴식시간은 물론이고 식사시간도 없다. 지난 3월 1일부터 토요일에도 오후 6시까지 연장운영을 하게 되면서 노동시간이 더 늘어났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평택분회 이상길 총무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평택분회 이상길 총무삼성전자서비스지회

"손바닥 뒤집듯 확 뒤집지는 못해도..."

"노동조합에 왜 가입했냐고요? 바뀌어야 하는 게 분명하니까. 외근직 동료들의 현실도 너무 잘 알고 있고, 내근직으로 일하는 현재의 나도 너무 힘들기 때문이죠. 회사와 엔지니어의 힘의 관계를 완전히 뒤집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중립으로 세워놔야 내가 살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평택센터에 재입사할 때 72kg이었는데 불과 3년 만에 10kg이 빠졌어요. 원형탈모가 생기기도 했었습니다. 업무 스트레스, 불규칙한 생활 때문에 건강이 악화된 동료들이 많아요."


쉬지 못하고 일만 하면서 그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상길씨의 경우 2010년, 2011년도에는 오전 2, 3시에 퇴근하고 다음날 정상출근하는 일도 잦았다. "그때는 노하우가 부족했던 탓도 있다"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다.

"노조 하기 전에는 토요일에 쉬는 것도 연차를 쓰고 쉬라고 했었어요. 그때는 잘 몰랐으니까 그렇게 했죠. 쓰지 않은 연차는 수당으로 돌려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노조가 생긴 이후에 이 문제를 지적하니까, 지난 2년간의 수당을 지난 달에 지급했더라고요. 그런데 지급된 금액이 계산이 안 맞아요. 제가 토요일에 쓴 연차가 몇 번인지 기록도 보여주지 않아서 답답하죠."

그동안 몰랐던 '나의 권리'를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 보람찬 일이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삼성'인데, 노조활동을 시작하면서 두려움은 없었을까.

"솔직히 처음엔 두려운 마음도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감이 생겨요. 우리의 이야기가 세상에 많이 알려질수록,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고객은 신"이란 삼성 철학 아래 병들어가는 엔지니어들

"고객은 왕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삼성은 이를 뛰어넘어 고객을 "신"으로 만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서비스직 종사자들이라면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문제일까.

"수리 후 고객에게 만족도를 묻는 '해피콜'에서 10점(매우만족)이 아닌 8점(만족) 이하가 하나라도 발생하면 퇴근을 못하고 '대책서'를 써요. 실상 거의 모든 직원들이 써야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죠. 고객에게 '해서는 안 될 말' 규정도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물론 고객에게 불쾌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으로 정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저는 수리만 하고 수리비는 회사에서 정한 규정대로 받을 뿐입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고객상담실로 연락하세요" 같은 말도 금지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즉, 수리비나 제품에 대한 불만 등 엔지니어의 책임이 아닌 부분도 "네 선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이다. 수리비에 불만을 품은 고객이 해피콜에서 '1점'을 주면, 엉뚱하게도 엔지니어가 대책서를 써야 한다.

고객이 '신'이 되자, 엔지니어는 '하인'이 되었다. '진상고객 콘테스트'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온 김에 이것(가구) 좀 옮겨 달라", "나가면서 쓰레기 좀 버려 달라"는 요구부터, "우리 집 강아지 자고 있으니까 좀 이따가 와라"라고 하는 고객까지. 마음에 안 든다고 전화해서 "너 내가 지금 칼 들고 가서 죽여 버린다"라고 폭언을 하거나, 센터 안에서 멱살을 잡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사는 물론이고 센터 사장들도 고객의 잘못된 행동들로부터 엔지니어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고객이 꼭 '신'까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서비스 엔지니어들은 스스로의 기술력과 서비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삼성과 일부 고객들은 '더 극진한 대우'를 요구하며 엔지니어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내가 요구하는 서비스가 '정당한 서비스'인지 고민하는 사려 깊은 '개념 고객'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삼성 제품을 하나라도 가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나친 희생을 대가로 하는 서비스는 옳지 않습니다. 나는 엔지니어의 노동과 인격을 존중합니다. 삼성도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야 합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평택센터분회 조합원들. 이상길 총무와 동고동락하는 소중한 동료들이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평택센터분회 조합원들. 이상길 총무와 동고동락하는 소중한 동료들이다.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조합이 생기고 달라진 점은...

노조의 정당한 권리인 임금·단체교섭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사측의 불성실한 태도 때문이다.

"최근에 전국적으로 센터 사장들이 경총에 교섭권을 위임했어요. 교섭에 나온 경총사람은 우리가 건당수수료가 아닌 월급제로 임금 받는 줄 알고 있더군요. 아주 기본적인 사전조사도 안 한 거죠. 내가 자세히 설명했더니 부끄러운지 얼굴이 벌개지더군요. 이런 사람들이 무슨 교섭을 하겠다는 건지, 솔직히 아주 화가 났습니다. 그러더니 5,6,7차 교섭에는 불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변화들이 있다. 노조가 생긴 후엔 오후 6시에 '칼 퇴근'을 하고, 부당한 대책서 작성을 거부하게 되었다. 토요일에 쉬고 싶으면 연차를 쓰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쉬겠다"라고 얘기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그에게는 쌍용자동차에 다니는 친구가 있는데, 2009년에 노조가 정리해고에 맞선 공장점거 투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저거 왜 하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가 노조를 한다니까 그 친구가 응원해주더라구요. '느낌 아니까~ 투쟁!' 이렇게(웃음). 돌이켜 보면, '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했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달라졌다고 할까요. 동료들과의 관계도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후배들에게 싫은 소리를 많이 했어요. 이제는 후배들한테 욕도 안하고. 아, 지금도 장난으로는 합니다(웃음). 대화를 많이 해요. 동료의 소중함을 알게 된 거죠. 예전에는 솔직히 그걸 몰랐어요.

예전에는 아침에 인상 쓰면서 출근했어요. 지금은 아침에 웃으면서 출근하고, 후배들에게 먼저 '하이' 하고 인사해요. 제가 봐도 많이 밝아졌어요. 노동조합이 성공해서, 동료들과 함께 평생 즐겁게 일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에요. 내근·외근 구분 짓지 않고, 서로 도우며 한 가족처럼 공생하고 싶어요."

고 최종범 조합원이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인터뷰 며칠 뒤인 10월의 마지막 날,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천안센터에서 일하던 한 조합원이 사장의 폭언, 노동조합 탄압, 극심한 노동강도와 생활고에 못 이겨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상길씨와의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희망적인 에너지를 느낀 직후라 충격은 더 컸다.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 천안센터 최종범 조합원의 유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이 세상 밖으로 나온 지 4개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난 희망적 시간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운 현실에 매여 있는 절망적 시간이기도 했던 걸까. "배고파 못 살았"다니.

하지만 고 최종범 조합원은 생전에 노동조합을 '우리에게 생긴 힘'이라 불렀고, 가족과 동료들에게 쉴 새 없이 노동조합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절망스러운 현실'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유서를 찬찬히 곱씹어보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말들이 보였다. 평화시장 동료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자신의 죽음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꿈꾸며 떠난 청년 전태일처럼, 그 또한 유서에서 동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디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1500명 노동조합 동료들은 슬픔에 빠져 주저앉아 있지 않는다. 유서에 담긴 뜻을 곧바로 알아차린 그들은 동료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한 중요한 싸움에 나섰다. 진실규명, 사장과 본사의 사과, 고인의 명예회복, 노조탄압 중단,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전국 각 센터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유서에서 언급된 '전태일'의 정신을 기리는 전국노동자대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1970년의 전태일과 2013년의 최종범이 만나는 날이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노동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비통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태일은 어떻게 희망이 되어왔는지, 최종범이 남기고 간 꿈을 우리는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삼성전자서비스 엔지니어들의 꿈과 희망을 곁에서 함께 키워주고 지켜줄 든든한 '친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고 최종범 조합원이 하늘에서라도 밝게 웃는 날을 우리가 함께 꼭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사회진보연대, 삼성노동인권지킴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삼성 #삼성전자서비스 #AS기사 #서비스센터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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