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갈 길 멀다엄마라고 너만 보고 있진 않는다. 인생 이모작 중이지. 가운데 손가락 끝이 짓눌리도록 써대고 있다. 손이 아플수록 겸손 모드가 된다. 아이한테 뭘 지적하나. 남의 인생 베끼는 주제에...
한진숙
사실 엄마도 내 꿈꾸기 바쁘다. 불혹 넘은 나이에 문학 소녀가 내 속에 자라고 있다. 요즘 나를 매료시킨 문체를 가진 작가의 작품을 손으로 베껴쓰기 중이다. 그 작가도 등단 전에 베껴쓰기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 방법까지 베끼는 중이다. 손가락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그거 베끼는 사이에 한 살 더 먹을 것 같지만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 엄마 하는 짓을 보는 아이들은 "왜 따라 써?"라고 묻는다. "공부하는 거야"라고 답한다. 베껴쓰기 공부하는 엄마 옆에 꼬맹이들도 앉아 책을 보거나 한글 쓰기를 한다. 큰 놈은 자기 요새에 은둔 중이고.
어느 날, "이것 좀 봐줘. 이상한데 없어?"라며 아이는 글을 한 편 내민다. 학교 문학상 모집에 응모할 소설이란다. 요새에 앉아 뭔가 쓰고 있었군. 열심히 들여다본다. 문맥상 비문은 없지만 상당히 난해한 소설. 그래도 군데군데 감정표현이 꽤 정교하다. 누가 아는가. 장차 작가가 될 우리 아이의 첫 번째 습작으로써 후배들이 꼭 챙겨보고 싶어하는 소설이 될지. "괜찮네"라고 말해준다. 문학상 장원은 어렵겠다는 말은 삼키고.
근 3일 동안 소설 집필에 전념하던 아이는 작품을 내고 난 후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아니면 노트북으로 <응답하라 1994> 삼매경에 빠져 "밥 먹자" 부르는 소리도 못 듣거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빠져 있는 아이는 곧 공부 안 하고, 나태하고, 밉고, 안 예쁘고, 노는 아이다.
법륜스님은 아이가 컴퓨터에 빠져있으면 '컴퓨터를 하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라고 감사기도 하라고 하셨다. 나가서 나쁜 짓은 안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스님들이 입적하면 괜히 사리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맛있는 저녁 반찬 해서 배부르게 먹여 놓고 아이가 식탁을 떠나기 전에 재빠르게 물어본다.
"가끔 공부 하는 거지?""그럼. 수학도 하고 영어도 하고.""그래? 매일매일? 얼마나?""매일 하려고 했는데 이틀에 한 번꼴로…. 다섯 문제씩 풀기, 푼 다섯 문제는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기.""수학은 서술형이니까 그렇다 쳐도 영어는 그것만으론 안 되지." "중1 영포자(영어 포기한 자)는 없어? 영어는 정말 나랑 안 맞아.""중1 영포자면 공포자(공부 포기한 자) 아닐까? 발음기호 읽을 줄은 알지?"자기 아이가 고등학교 가서야 영어 발음기호를 익혔다는 어떤 엄마 말이 생각나 발음기호 얘기를 꺼냈다. "그건 알지"라는 대답에 일단 안심하고 영어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알아? to 부정사 다음은 동사원형인 건 알아? 속사포 질문을 해댄다. 배우긴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녀석.
문법 따로 공부 안해도 돼. 선생님이 가르치는 문장을 익히면 되는 거야. 영어는 하는 만큼 나와. 네 막내동생이 엄마라는 말을 말하고 쓰기까지 얼마나 자주 엄마라고 발음하고 엄마라고 썼겠니. 영어도 국어처럼 그렇게 여러 번 하면서 익히는 거야. 주절주절…. 긴 잔소리에 피곤해진 아이는 소파에 누워버린다.
"혼자 하기 어려우면 학원도 생각해보자. 아니면 엄마랑 영어 들은 날 1시간씩 같이 복습하자. 무슨 요일이야, 영어 들은 날?""월화수목금!"아이는 재빠르게 대답하고 얼굴을 돌려버린다. 엄마도 일이 있는데 저 혼자 좀 해보지! 생각을 하는 순간 내 욕심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엄마는 의젓하고, 성실하고, 예쁘고, 밝고, 제 할 일 스스로 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 곧 완벽한 아이를 요구했던 것이다. 팔랑귀고, 툭 하면 외식하고, 돈도 못 벌고, D자 몸매고, 아직도 헤매는 엄마면서. 밥이나 다 소화시킨 다음에 말할 걸.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어"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