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 1회 서울 사람편기차와 지하철의 차이를 모르는 삼천포 장국영은 신촌 하숙집을 찾아가기 위해서 신촌행 지하철을 기다리지만 신촌행 지하철은 오지 않는다. 갖은 우여곡절끝에 그는 10시간이 넘어서야 신촌 하숙집을 찾을수 있었다.
tvn
완제품 창고엔 방금 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와는 6개월 후 생산팀으로 부서가 바뀌기 전까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자정이 넘을 때까지 11톤 트럭에 박스를 날라야 했다.
그날 저녁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선배를 따라 회사에서 마련해 놓은 방 2칸짜리 기숙사에 경직된 몸과 마음을 풀었다. 아니 우리 모두 조금씩 낯선 상황에 놓인 채 결코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길눈이 어두웠던 나는 마치 복사해 놓은 것처럼 똑같은 성남 상대원1동의 골목 사이사이를 헤매다 결국 회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렇듯 나와 친구들의 공장 적응기는 <응사> 속 신촌 하숙생들의 서울 생활 적응기와 흡사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응사> 속 인물들은 대학 신입생, 그리고 나와 내 친구들은 취업 실습생이라는 점이다. 취업!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를 보호해줄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더 이상 옆에 없었다. 우리가 첫발을 내딛은 그곳은, 기차와 지하철의 차이를 알지 못했던 <응사>의 '삼천포 장국영'처럼 세상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두꺼운 벽이었다.
생산팀으로 갔던 두 친구와는 달리 완제품 창고의 나와 친구는 취업 첫날부터 야근을 해야 했다. 밤 9시가 넘도록 야근을 하고 기숙사를 찾지 못한 채 어두운 골목길을 세 시간이 넘도록 헤매야 했다. 그렇게 취업을 나온 지 일주일 만에 내 몸은 쌍코피로 반응했다. 사무실에서 전화 받는 법부터 회식 할 때 술자리 에티켓까지, 교과서를 벗어난 문제들은 때로는 회사 선배에게 때로는 직속 상사에게 호된 질책을 들어가며 풀어야 했다.
명절을 쇠고 돌아오는 길 수원역엔 언제나 먹잇감을 찾는 승냥이 같은 시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는 시골 촌놈의 어리숙함 때문에 수원역의 한 봉고차에서 24개월 할부로 세계문학 전집을 구입하기도 했고, 누구는 금장 CD 스무 장을 50만 원에 사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산 세계문학 전집은 여전히 내 책상 밑에 켜켜이 먼지 쌓인 채로 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 월담을 할 무렵 시내에 노래방이 생겼고 삐삐가 생겼다. 삐삐는 학교 기말시험의 최첨단 커닝도구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들 때문에 내 등수는 몇 단계 밀려났다. 번호를 밀어 쓴 몇몇 친구의 비명소리를 듣고 속으로 고소해 하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X세대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나와 친구들을 볼 때 '신인류의 탄생'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세련되지 않았다.
열아홉.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성인도 아닌 어정쩡한 시기. 그것은 사회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였다. 대학생이 아닌 사회인을 선택한 공고생으로서 우리는.
회사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다른 학교에서 취업을 나온 친구들은 하루 이틀 만에 그만두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실습이 끝나고 나서도 회사를 계속 다녔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무단 결근을 했다. 교회도 나가지 않았다. 회사에서나 교회에서나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나의 조용한 일탈.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를 배회하다 혹시나 싶어 확인한 삐삐에 녹음된 개척교회의 누나와 회사 선배의 염려 섞인 목소리로 작게나마 불안한 청춘에 대한 위안을 받기도 했다.
<응사>의 신촌 하숙집의 다양한 에피소드는 6개월간의 실습을 마치고 정식으로 회사원이 된 입사 동기들과의 자취생활과 오버랩된다. 회사 생활 2년이 지났을 때쯤 우리는 선배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숙사를 탈출하기로 했다.
20년 동안 응답받지 못했던 것 중 하나, <응사>가 답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