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출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청와대
나도 그런 수많은 '촌것' 중의 하나였다. 고3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철학도나 역사학도를 꿈꾸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 학교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부터는 국어국문학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런 묵직한 질문이 뒤따랐다. 무슨 돈으로 대학 가지? 가난한 집안 형편은 나를 역사학도나 철학도, 또는 국어국문학도의 길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했다.
육사가 내 대학 입시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게 그 무렵이었다. 수업 시간 중에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과 친구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가 큰 영향을 주었다. 합격만 해서 들어가게 되면 평생 자랑스러운 전문 직업 군인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가난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일도 결코 생기지 않을 터였다. 솔깃해하는 내게 선생님과 친구들은 국비 유학이니 대학원 진학 지원이니 하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모두가 꿈같은 일들이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 육사가 자리잡았다. 문제는 성적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 수위권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보통' 학교가 아니었다. 순천시와 여수시를 비롯해 전남 동부의 여섯 개 군에서 공부깨나 하는 '수재'들이 일부러 찾아드는 전통의 '명문고'였다. 중학교 때 기억만 믿고 자만해 있던 내게 700여명이 훨씬 넘는 '수재' 동기들은 현실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가르쳐 주었다. 입학 직후 70여명 가까운 반에서 10위권에 있던 내 성적은 2학년 말 20위~30위권에서 오르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쉽지 않았다. 모두들 무섭게 공부했다. 반 친구들 대다수에게 오후 10시까지 하는 야간자율학습은 기본이었다. 오후 11시를 넘어 자정까지 문제집을 파고드는 친구들도 부지기수였다. 공부는 결코 나만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성적 변화도 거의 없었다. 5월엔가는 모의고사 점수가 오히려 40위권으로 추락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야말로 최악의 '멘붕'이었다.
그 잔인한 5월을 지나면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취약 과목이던 수학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학 과목은 육사 시험에서도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기출 문제를 봐도 고난도 문항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 해 처음으로 나온 '블랙 ○○'이라는 이름의 얇은 수학 유형 문제집을 통째로 외워버리기로 했다. 검정과 노랑으로 단순하게 디자인된 그 책의 표지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무식한 수학 공부 덕분이었을까. 모의고사에서 수학 점수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에 자극을 받아 다른 과목들도 더욱 열심히 파고들었다. 공부에 흥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모의고사 점수가 상승세를 탔다. 시원찮은 내신이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육사 본고사 점수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9월 초, 드디어 원서를 접수했다. 학교 전체에서 15명 정도가 지원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조금 더 알아보니 다들 나름대로 쟁쟁한 실력자들이었다. 우리 반에서는 전체 66명 중 꾸준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친구 하나가 나와 함께 지원했다. 다들 성적으로 다퉈야 하는 경쟁자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성적이 낮은 나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5월 이후 죽자사자 매달려 나름대로 성과를 본 경험과 그로 인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야말로 '고고씽'이었다.
시험은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치렀다. 광주에는 시험 치르기 전날 도착했다. 고등학교 근처 여인숙에 짐을 풀었다. 학교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얇고 까칠까칠한 누비 이불을 덮고 잔 기억도 머릿속에 또렷이 살아남아 있다.
그런데 시험을 치르던 당일의 풍경과 끝나고 나서 순천으로 이동하기까지의 과정이 내 기억에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무엇 때문일까. 나는 한동안 그 이유를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언뜻 떠오르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띄엄띄엄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들은 당시에 겪은 어떤 정신적 상처로 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학력고사 3개월 전, 머리를 빡빡 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