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대표 "정당 해산심판 전면무효"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와 시민사회단체 대표, 각계 원로들이 6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위헌적인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의결 전면무효 시민사회 긴급 기자회견'에 참석해 박근혜 정부의 정당 해산심판 청구를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유성호
그런데, 1956년의 독일공산당 해산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해산 청구가 있었던 1951년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동서냉전이 본격화되던 시점으로 당시 미국의 필요에 의해서 아데나워 정권에서 서독의 재무장이 추진되고 있었다. 나치와 2차대전의 교훈으로 독일의 재무장에 대해서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정당은 독일공산당이었다. 독일공산당은 독일의 재무장을 반대하고, 평화협정체결을 주장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여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연방재판소는 정당해산청구 5년만인 1956년 독일공산당을 위헌정당으로 선언하며 해산을 결정했다. 나치당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위헌정당 심판제도가 거꾸로 나치 부역자였던 정부측 법률대리인과 헌법재판관들에 의해 나치의 최대 피해자였던 정당을 해산하는데 이용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독일공산당 해산 후 독일재무장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독일공산당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인쇄소와 출판사, 신문사가 폐쇄됐다. 공산당과 조금이라도 관련 혐의가 있는 운동가들은 모두 수사 대상에 올랐고, 이를 이유로 관련자들은 직장에서, 공직에서 쫓겨났으며, 연금수령권마저 제한 당했다.
노동조합, 농민단체, 여성운동 조직들, 소비자 운동단체들과 청소년 교류단체, 동서 스포츠 교류를 추진했던 스포츠 단체 등 수백개의 단체가 활동을 금지당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나눠주는 행위도 금지되고, 동독과의 서신 교류와 스포츠 교류도 감시 또는 금지 대상이 되고, 맑스 등 사회주의 서적의 학습도 금지됐다.
지금의 독일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1950년대 독일공산당 해산 당시 독일 전역에서 벌어졌다. 독일공산당 해산 판결과 함께 불어닥친 후폭풍으로 도래한 이 독일판 공포정치의 시대는 독일 민주주의의 암흑기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의 교훈으로 이후 독일인들에게 누군가의 생각이나 의도를 재단해 처벌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1956년 독일공산당 해산 판결도 그후 사문화됐다. 아데나워에 이어 집권한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정권은 1968년을 기점으로 동방정책을 실시하면서 해산된 독일공산당을 그대로 계승한 공산당 창당을 승인했고, 지금도 그 정당이 독일에서 합법적으로 활동 중이다. 독일공산당 위헌 판결은 10년도 안 되어 존립 근거를 상실한 구시대 판결이 된 것이다.
미국 메카시즘과 대만 공산당 허용의 교훈 1950년 2월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Joseph McCarthy)의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에서 시작된 매카시즘은 미국 역사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가장 부끄러운 장면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매카시는 경력위조, 상대후보 명예훼손, 로비스트 금품 수수, 음주 추태 등으로 정치 생명이 끝날 위기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충격적인 이슈를 들고 나왔다. 우리나라 군사독재 정권들이 선거를 앞두고, 또는 정권의 정통성이 위협받을 때마다, 혹은 부정선거를 덮기 위해서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북풍을 조작하는 수법과 묘하게 닮아있다.
매카시의 이 폭탄 선언으로 미국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매카시가 언론 앞에 설 때마다 공산주의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거물들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매카시의 말은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매카시의 대중적 인지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의회에 특별조사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y)가 구성되고 미국 사회를 넘어 전세 계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중국 공산화와 한국전쟁에 대한 충격으로 가장 먼저 메카시즘의 타깃이 된 것은 중국 관련 외교관과 국무성 정치인과 중국통 정치학자들이었다. 메카시즘의 광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화 등 문화예술계와 과학계에까지 불어닥쳐 미국 핵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 세계적인 거장 찰리 채플린 등이 희생양이 되었다.
이 광풍은 급기야 당시 국무장관 덜레스를 비롯한 외교정책 담당자를 집어삼키더니 트루먼 전 대통령까지 공격하고 나섰다. 그리고 중국과 전쟁을 진행한 아이젠하워 장군을 비롯한 군인들까지도 공산주의자 명단에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매카시 광풍으로 1933년부터 20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민주당 정권은 막을 내리고,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마녀사냥에 동조했다. 민주당의 매카시즘 동조는 1950년대 초반 미국 민주주의를 암흑기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또한 진보당과 전교조 등을 타깃으로 새누리당과 극우세력이 주도해 몇년째 진행되고 있는 한국판 매카시즘에 민주당이 묘하게 장단을 맞추고 있는 모습과 닮아 있다.
대만사례도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난 장개석의 국민당은 이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민단체법이라는 법으로 '공산(共産)'이라는 말이 들어간 모든 단체의 설립과 활동을 금지시켰다. 당연히 공산당도 금지되고,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단체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60년만인 2008년 6월 대만 사법원(대법원)은 "공산주의를 금지한 인민단체법 규정은 결사와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려 공산당 창당과 활동이 합법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대법원 판결은 곧바로 효력을 발휘해 그 해 7월 국공 내전이 종결된 지 59년 만에 대만 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이 대만공산당 창당 대회에는 우리의 안전행정부에 해당하는 대만 내정부 관리들이 참석했고, 정식으로 당 대표도 뽑았다. 인구수에서나 경제규모, 군사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공산주의 정권인 중국을 바로 코앞에 둔 섬나라 대만에서도 공산당을 금지하는 것은 위헌판결을 받는 게 현실이다.
사실 우리가 '자유 중국'이라고 불렀던 대만은 국민당이 대륙에서 쫓겨왔던 1950년부터 거의 반세기 동안 계엄령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했고, 장개석에 이어 그 아들 장경국이 종신으로 총통을 하던 세습독재국가였다. 심지어 야당도 없고 제대로된 선거도 없는 나라였다. 나라 이름 앞에 '자유'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런 나라에서도 공산당을 법으로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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