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예화된 예비군?약속한 투자와 노력을 게을리한채 꼼수만 부리면 그게 가능할까.
예비군 홈페이지
"집에 빨리 갑시다."어디서 나온 말일까? 막차 시간에 쫓겨 급히 파해야 하는 술자리? 연장 12회까지 진행된 야구장? 도서관 종료 시각까지 공부한 취업준비생? 놀라지 말자. 예비군 훈련장이다. 그것도 '당나라 군대'라 조롱받던 대한민국 예비군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말이다.
지난 3월, 국방부가 전군에 걸쳐 '예비군 측정식 합격제'를 도입했다. '예비군 측정식 합격제', 말 그대로 예비군의 훈련 성과를 측정해 합격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의도다. 특히 사격, 훈련 태도 등을 따져 상위 20% 예비군을 2시간 일찍 귀가시키는 방식이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개구리 마크'(예비군 표식의 속칭)만 달면 4성 장군(참모총장)이 와도 거들먹대던 예비군들이 "2시간 일찍 보내준다"는 말에 "빨리 움직이자"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덕분에 훈련을 진행하는 교관과 조교는 한결 수월해졌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비군 사이에 묘한 긴장까지 생겨났다. 측정식 합격제에 개인 평가 뿐 아니라, 분대별 '그룹 점수'도 포함된 탓이다.
국방부는 회심의 미소를 숨기지 않고 있다. 측정식 평가가 '신의 한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예비군의 적극성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국방부의 수고를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2시간의 유혹',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지난 10월 예비군 동원훈련을 다녀온 김민호(27)씨는 "올해로 예비군 4년차인데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고 왔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주저하지 않고 '2시간 빨리 보내줘서'라고 했다. 또 다른 동원훈련 참가자 이승학(28)씨도 다르지 않았다. "총 6발의 사격을 정말 집중해서 쐈다"고 했다. 같은 이유였다. "20% 안에 들면 2시간 일찍 보내준다"는 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한 참가자는 "예비군 훈련에서 처음으로 신병훈련소 같은 열기를 느꼈다"고 했다. 특히 화생방 훈련의 경우, 15초 이내 방독면을 착용하는 평가에선 추운 날씨인데도 땀이 날 정도로 열성을 다했다고 한다.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백미는 안보교육시간에 나타났다. 그 시간은 예비군에게 있어 취침시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졸고 있는 예비군이 확연히 줄었다. 눈까지 반짝이며 "종북을 잡아야 나라가 선다"는 연사의 말을 따라 적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뒤쪽에 서 있던 교관은 집중해서 듣는 예비군의 이름을 따로 체크했다. 순간 다른 예비군들의 부러운 시선이 보였다.
하지만 전에 볼 수 없던 꼼수도 등장했다. '모나미 볼펜'을 주머니에 챙긴 예비군들이 많아졌다. 사격 평가 시 미리 챙긴 볼펜으로 표적지에 구멍을 뚫어 마치 명사수가 쏜 것처럼 조작하려는 의도였다. 사격이 '측정식 합격제'의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임을 미리 파악한 것이다. 박명훈(가명, 25)씨는 뒤쪽에서 조용히 종이에 구멍을 뚫으며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안하면 손해"라 했다.
물론 2시간 일찍 보내준다고 모든 예비군이 변한 건 아니었다. 취업준비생이라 밝힌 최정남(28)씨는 "밖에서도 경쟁 때문에 죽겠는데 예비군 훈련까지 와서 경쟁에 몰리고 꼼수 부려야 하는 스스로가 씁쓸하다"고 말했다.
최씨는 그러면서 "이럴바엔 그냥 정상적으로 오후 6시에 가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훈련 3일차가 되자 첫 날 보였던 예비군들의 열의는 많이 식어 있었다. 이미 대부분이 측정 평가에서 밀려났음을 체감한 것이다. 그 순간 예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