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주진모 분).
MBC
충혜왕은 왕이 되기 전에 몽골에서 살았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에 따르면, 몽골에서 그는 술 마시고 노래하는 데에 빠져 살았을 뿐만 아니라 위구르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에게는 '발피(撥皮)'라는 별명이 붙었다. 발피는 망나니 혹은 못된 건달 등을 뜻한다.
충혜왕의 기질은 왕이 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충혜왕 세가'를 보면, 충혜왕은 왕이 된 지 한 달 만에 두 차례나 사냥을 나갔다. 국정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어야 할 시기에 한가롭게 사냥에 빠진 것이다. 그의 사냥 횟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많아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회나 놀이에 참가하는 횟수도 계속 늘어났다. 그는 물놀이 혹은 격구 관람을 특히 좋아했다.
죽은 아버지의 여자 건드린 충혜왕, 결국...충혜왕의 집권기는 제1차 집권기(1330~1332년)와 제2차 집권기(1339~1344년)로 나뉜다. 현재 드라마 <기황후>는 제1차 집권기 직후를 다루고 있다.
충혜왕은 1332년에 왕위를 빼앗겼다가 7년 뒤에 복귀했다. 제2차 집권기간인 1339년 이후에 그는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성들을 가까이했다. 그는 툭하면 아버지의 후궁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이런 스캔들을 다 소개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충혜왕은 제1차 집권기 이전에 몽골에 있을 때도 성추문을 일으키고 제2차 집권기에도 세상을 시끄럽게 할 정도로 성추문을 일으켰다. 그런데 기록만 놓고 보면 제1차 집권기에는 별다른 성추문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충혜왕이 제1차 집권기에 문제를 전혀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제2차 집권기 때에 그의 이성관계가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죽은 아버지의 여인들을 집중적으로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행적이 문제가 된 것은 단순히 '여성'을 가까이해서가 아니라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여성들'을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충혜왕이 제1차 집권기에도 여성들을 가까이했지만 그 여성들과의 교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사>에서 이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몽골에서처럼 사냥과 놀이에 푹 빠져 지낸 제1차 집권기에 그가 유독 여성들을 멀리했으리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드라마 <기황후>에 나오는 절제 있고 애민적인 충혜왕의 모습은 실제 충혜왕과는 전혀 딴판인 것이다.
이런 충혜왕의 행실은 몽골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몽골은 고려 백성들을 직접 통제하지 못했다. 고려와의 40년 전쟁을 무승부로 끝내고 겨우겨우 화친을 체결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몽골은 고려란 나라를 항상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몽골은 고려왕을 통해 간접적으로 고려 백성들을 통제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렇기 때문에 몽골은 고려왕이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고려왕이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몽골이 고려왕을 통해 고려 백성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이 일부 위성국에 대해 민주화를 강요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미국이 위성국에 대해 민주화를 요구한 것은, 자국의 통제를 받는 위성국 정권이 국내의 민주화 열풍으로 붕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미국이 한국의 독재정권을 압박한 것도 동일한 차원의 일이다. 몽골 역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충혜왕을 불편해 했다.
충혜왕의 모습을 지켜본 몽골 조종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왕족으로 성장한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충혜왕은 사생활이 문란했다. 몽골의 입장에서 볼 때, 충혜왕이 계속 권좌를 지켰다가는 고려왕을 통한 간접적 고려 통제가 힘들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몽골은 충혜왕을 끌어내릴 방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마침, 충혜왕이 몽골 조정의 눈총을 받던 시점에, 몽골 조정에서 중대한 권력교체가 발생한다. 충혜왕을 지지하던 연첩목아가 죽고 충혜왕을 싫어하던 바얀 메르키트가 권력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몽골 조정이 충혜왕에 대한 나쁜 평판을 명분으로 충혜왕을 폐위시키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몽골 조정이 충혜왕을 끌어내리게 된 또 다른 계기가 있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에 따르면, 이 시기에 몽골 조정에 '충혜왕이 고려에 귀양 온 토론테무르와 손잡고 몽골을 배반하려 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충혜왕이 토곤테무르를 죽이려 했다는 이유로 몽골이 충혜왕을 폐위시켰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는 제보를 근거로 몽골이 충혜왕을 폐위시켰다. 드라마에서 제시한 충혜왕의 폐위 사유와 실제의 폐위 사유가 전혀 딴판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충숙왕이 아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던 상황에서, 충혜왕 스스로 각종 비행을 저지르는데다가 몽골의 권력구도마저 충혜왕에게 불리하게 개편되고 거기다가 '충혜왕이 토곤테무르와 손잡고 몽골을 배반하려 한다'는 제보가 몽골에 들어갔기 때문에 충혜왕은 열여덟 살 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인 충숙왕이 다시 고려왕이 됐다.
이처럼 충혜왕의 제1차 집권기는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멋진 이유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의 권력다툼, 본인의 비행, 몽골 조정의 권력교체 등의 복합적 원인에 의해 자리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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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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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의 여자 건드린 아들... 자기 무덤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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