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도無爲刀
황인규
"시간이 별로 없소이다. 나는 날이 밝으면 움직이지 않는 부류라오. 그러니 그 전에 끝냅시다.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시간은 당신 편이 아니오."
모충연은 몸을 한번 움직여보았다. 고통이 욕조 속에서 출렁거렸다.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보오, 나는 강호에서 은퇴하여 이 조그만 고을에서 경서나 읽으며 소일하는 촌부일세. 내 강호의 은원을 떠난 지 십여 년, 새삼 무슨 맺힌 원한이 있길래, 나를 이다지도 핍박하는 것이오?"모충연은 말을 하고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떨어지는 낙엽도 멈춘다는 비천문(飛天門)의 수제자로서 강호를 종횡무진했던 그였다. 비천문이 스승 태허진인을 개조로 하여 강호에 명성을 드높인 지 어언 오십 년,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태허진인이 폐문을 선언하고 제자들에게 모두 흩어질 것을 명했다. 그것은 무림인들에게 경천동지할 만큼의 크나큰 사건이었다. 강호의 사방 만리에 억측이 구구했으나 누구도 거기에 대한 내막과 진실을 밝혀내진 못했다.
폐문을 선언한 태허진인은 종적을 감췄다. 그가 변방의 장백산에 들어갔다느니, 서역의 길목인 곤륜산에서 보았다느니, 혹은 중원의 이름 모를 초부로 변장하여 지내고 있다느니 하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어느 것도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었다.
문파가 해체되자 비천문의 제자들은 각기 다른 유파에 합류하거나 각자의 문파를 개조하여 비천문의 아류문파로 남았다. 강호에서는 이들을 통칭 비류파(飛類派)라고 하였다. 모충연은 강호의 구대문파나 무림맹에서 장로 자리 하나쯤은 너끈히 꿰찰 정도의 명성과 무공이 있었지만, 타고난 성격이 무르고 허욕이 없는지라, 그저 옛 문파의 맥이나 잇고 스승의 자취를 남기고자 조그만 문파를 하나 세웠다.
그가 조그만 장원을 지어 비영문(飛影門)이라는 명호로 현판을 걸었을 때가 52세, 스승 태허진인이 은둔한 지 삼 년 째 되던 해였다. 그는 비영문이 강호에 부끄럽지 않은 약간의 무명(武名)을 남겼다 싶자, 수제자에게 장문인의 자리를 넘겨주고 이곳 외곽에서 촌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벌써 십일 년 전 일이다.
모충연이 비영문을 개조하고 그럭저럭 세(勢)를 키울 무렵, 장원의 별채에 잠시 머무르던 객으로부터 장문인 면담신청이 들어왔다. 무명의 유세객이라고 칭한 자는 모충연에게 밀봉한 편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뜯어보니 스승 태허진인의 인장이 선명했다. 다가오는 임술년 삼월 보름 산서의 대운산에서 사대제자들과 회합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스승님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한 행보를 부탁했다. 이리하여 사대제자들은 문파가 해체되고 난 지 십오 년만에 스승님과 해후하는 감격에 찬 회합을 가졌다.
태허진인은 십 년 동안 천축에 있었다고 했다. 머나 먼, 아득한 전설과도 같은 천축국이 실제로 존재했고 그곳에는 중원과는 별다른 세계였다고 스승은 전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3개월마다 회합을 가지며 새로운 무의 경지를 설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중원의 무공을 집대성할 것이니 제자들에게 저술과 필사를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무학을 집대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던 스승님이 어느 날 그동안 정리해 놓으셨던 무학서들을 다 불살라 버렸다. 오 년을 공들였던 수고가 한줌의 재로 날아가는 걸 보면서 사대제자들은 크게 의아해 했으나 감히 그의 깊은 속을 헤아리거나 추궁하지는 못했다. 다만 성격이 괄괄하여 안으로 잘 다지지 못하는 이제(二弟) 기승모가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을 뿐이었다. 스승님, 어찌 그동안의 노고를 그리 헛되이 날려보내신단 말입니까? 진인은 입가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 세상의 온갖 무학서를 정리하다보니 깨달은 바가 있노라. 중원의 각종 비기는 물론이요, 동으로는 고려의 무예와 그 너머에 있는 왜의 검술, 북으로는 원과 요의 궁과 창, 서로는 색목인들의 곤과 낭, 남으로는 만족의 기괴한 장치와 암기들을 연구하고 집대성했건만, 이 모든 것들을 무화시키는 한 가지 길을 알게 되었느니라. 앞서의 것들이 하나의 기(技)나 술(術)에 불과하다면 뒤의 것은 하나의 도(道)였느니라. 그것은 터득하게 된 까닭이 있으니 바로 천축(天竺)의 교(敎)와 리(理)였다. 이에 내가 크게 깨우친 바가 있어 단 하나의 저술로서 무학의 궁극을 남기고자 하느니라.
태허진인은 그 즈음에 방문한 기괴한 형상의 천축인과 밤을 지새우며 대화를 하며 천축의 책을 뒤적이곤 했다. 이따금 인체도를 그리고 경혈을 짚어가며 기의 운행을 천축인에게 설명을 하면 천축인은 또 무어라 하며 경혈 위에 부적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천축인이 태허진인과 일 년을 지내다가 떠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스승님은 무학서들을 불태웠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태허진인은 다시 저술에 골몰했다. 이제 단 하나의 깨우침만이 나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어떤 무의 기(技)와 예(藝)도 이 길 위에서 펼쳐지는 기(器)에 불과할 뿐이니라. 그러한 기(器)가 도(道)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이(理)의 도움이 필요한 것, 그 경지에 다다르는 길이 곧 경(經)이니라, 하고는 스승님은 그 책에 '무극진경(無極眞經)'이라 이름을 붙였다.
"당신과 개인적 원한은 없소. 다만 나를 이곳에 보낸 자가 원하는 것만 나에게 알려주면 되오."무영객은 탈을 쓴 것처럼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충연은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거나 누리고 있는 것 중에서 남이 탐할 만을 것을 생각해보았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혼인도 하지 않고 무공수련에만 평생을 바친 일생이었다. 오로지 무공만 아니 무공의 기억만 남아 있을 뿐 그에게는 그 어느 것도 강호인들이 노릴 만한 재물이나 비급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림맹이나 구대문파와 관련한 고급 정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후학들에게 무예의 길을 조금 깨우쳐주며 서생처럼 경학에 몰두한 게 최근 십 년 간의 삶이었다. 모충연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무영객의 입가에 비로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대협은 내가 지필묵을 가져올 테니 요결만 적으면 돼." "요결이라니?""진경, 무극이십사결(無極二十四訣),"모충연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회오리바람이 일으키는 자장 안에서는 눈앞의 어떤 상황도 그저 강 건너 불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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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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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비천문의 수제자였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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