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빗속에 마을주민 상당수가 다치면서 박상진(94) 어르신이 주민의 부축을 받고 나왔다.
김종술
몸도 가누기 힘든 94세 어르신도 거리로 나섰습니다.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8일, 밀양 상동면 고답마을에서 최고령 할아버지인 박상진 어르신은 송전탑을 반대하는 주민들과 대치중이던 경찰을 향해 호통을 쳤습니다.
"우리가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월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뭐하는 짓이냐!"
경찰과의 몸싸움으로 쓰러지는 주민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기에 거리로 나선 것입니다. 이틀 전인 지난 6일, 한전은 밀양 송전탑 113번 공사장 길목에 컨테이너 박스 한 개를 끌고 들이닥쳤습니다. 바로 옆에 설치할 114번, 115번 송전탑 공사가 시작된다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돈 달라는 것도 아닌데..."이에 위기감을 느낀 주민들은 115번 송전탑이 들어설 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움막을 설치했습니다. 경찰은 이틀 동안 컨테이너를 앞세우고 마을 진입을 시도했고,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이를 가로막으면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틀간 총 20차례가 넘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5명이 연행됐고, 10여 명이 정신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다치고도 병원을 찾지 못하고 전쟁터를 지켜야 했던 주민이 10여 명이 넘었습니다.
8일에도 경찰과의 신경전이 이어졌습니다. 그때 지팡이를 들고 주민들의 부축을 받으며 박상진 어르신이 증손자뻘 되는 의경 앞에 나서 일장 훈시에 나선 것입니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의 중재가 들어가면서 마을 주민이 땅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경찰은 다른 곳으로 철수했고, 사흘간의 숨 막히는 전쟁은 끝났습니다.
박상진 어르신은 30년간 세무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90세 할머니와 고답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마을 최고령이기도 하지만 주민들도 어르신을 믿고 따른다고 합니다. '고답마을 전투'가 끝난 뒤인 지난 13일, 할아버지 집을 찾아갔습니다.
철제 대문을 여니 넓은 마당에 두 채의 한옥집이 보였습니다. 서예를 좋아한다는 할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서재에는 수백 년간 이어진 집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10여 개가 넘는 조상들의 영정. 붓걸이에는 여러 종류의 붓이 걸려 있고, 자신의 서예 작품으로 만든 병풍도 놓여 있었습니다. 어르신은 넓은 책상에 앉아서 잠시 회상하듯 말했습니다.
"18대 조상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선조부터 400년 이상을 살아온 곳이다. 공직을 끝내고 고향에 와서 선산도 돌보고 문중도 돌보기 위해 30년 전에 돌아왔다. 그리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송전탑 얘기가 나오면서부터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