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스러운 두 병사의 찢고 까부는 사사로움은 만담개그에 가까운 깨알웃음을 선사한다.
씨어터오
'착한' 연극 한 편을 만났다. 아니, 찾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굵직한 존재론적 고민이나 날 선 수사를 자근자근 내뱉는 작품으로 새해를 열기엔 '안녕치 못한' 뉴스들로 이미 충분했던 터였다. 공연 보기에 지칠 때면 머리가 소란스러워지는 작품보단 쉬어가고 싶은 작품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게 된다. 그럴 때 '착한' 작품과의 조우는 오랜 벗을 만난 듯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만약 '햄릿'의 정극적 요소를 절대적으로 중시한다면 두말없이 연극 '두 병사 이야기'를 관극리스트에서 제외할 것을 정중히 권한다. 이 작품에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고뇌가 그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더러 단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한 프로젝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극에 질렸거나(혹은 정극을 보다 졸았거나) 평소 주인공보단 그 외 인물들(행인1 등과 같은)까지 관심을 갖는 오지랖을 가졌거나 일상 속 잔재미나 감동을 주는 작품을 선호하거나(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 같은) 연극 초심자라면 주저 없이 극장을 찾을 것을 권한다. 모르고 봐도 낯설지 않고 알고 봐도 새로운, 그야말로 '착한' 작품인 까닭이다.
마이크로스러운 두 병사의 찢고 까부는 사사로움은 혀 짧은 유령(선왕)의 말을 그대로 재현해내거나 극중극의 대본을 디테일이 살아있는 만담개그로 승화시키며 '유방(유령의 이야기는 방에서만 한다의 줄임말) 프로젝트'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일개 병사 나부랭이인 버나르도와 프랜시스에게 햄릿의 가정사는 비극이 아닌 일종의 '막장드라마'였기 때문이다.